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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논리에 이제는 음택 보다 양택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풍수지리 그 증험적 진실을 밝힌다
정일균 선생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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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06  14: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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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그 증험적 진실을 밝힌다.
풍수논리에 이제는 음택 보다 양택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生家
고봉의 약보
고봉은 부친 물재(勿齋) 기진(奇進)과 모친 진주 강(姜)씨 사이에서 중종 22년(1527) 11월 18일 갑진(甲辰)시에 광주의 소고룡리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용동 용동마을이다.
고봉의 관향은 행주로서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인 셈이다.
고봉 9세 때 유교의 수신서인 효경을 읽기 시작하여 소학을 암송하고, 11세에 향숙에 나가 대학, 중용, 맹자 등 경서를 외웠으며 14세에 논어, 서경, 주역을 독파하였다.
20세(1546) 가을 향시의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32세 (1558) 10월 문과 을과에 장원한 뒤에 퇴계를 방문 四단 七정을 처음으로 논의하였다.
 36세에 검열을 시작으로 관로에 진출 성균관 대사성?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의, 이조참의 등 관직에 임하였다.
특히 41세(1567, 선조 즉위1년)에 사헌부 집의를 제수받고 검열에 나아가 조강(朝講)에서 행한 다음의 직언직소는 만조백관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고 한다.
「천하의 일은 반드시 시비가 있는 법이니 시비에 밝지 못하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 경사가 전도될 것입니다. 과거 중종 초기에 조광조가 끊어진 도학을 제창하여 밝혀서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처럼 만드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는데 불행히 간악한 소인의 모함을 받고 귀양가서 죽기까지 하였으니 지금까지 사람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조의 학문은 김굉필에게서  전해 받았고, 굉필은 김종직에게서 전해 받았으며, 종직은 정몽주를 스승으로 삼았으니 그 연원의 유래한 바가 바르고 순수하여 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언적은 한때 명유로 억울하게 죄를 입어 서쪽 변방에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이상의 두 선비는 이름이 죄적(罪籍)에 들어 있는 채 오래도록 신설(伸雪)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명께서 즉위하시어 그 사정을 밝게 아셨을 터이니 의당 먼저 그들을 표창하여 존중하소서, 이렇게 되면 국시(國是)가 정해지고 인심이 복종 할 것이니, 선대(先代)에 있었던 일이라 핑계를 대고 그냥 놔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정병연, ‘고봉선생의 생애와 학문’ pp35-36>
고종의 대표적 저서로는 고봉집, 주자문록, 논사록, 이기왕복서 등이 전해져서 학문연구의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고봉의 원 생가터를 찾아서
그 어떤 명인 명사든 그가 잉태되고 출태한 원생가터를 찾는 일이 간산보다 더 중요하고도 지난한 일이다.
고봉의 경우도 예외일수 없었다,
구전으로 용동의 원 생가터의 안산(案山)격인 건너편 칠봉마을 일우의 공터가 생가터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정말 혼란스러웠다.
필자는 이번 연재기획의 ‘풍수기행’을 쓰면서 유명인사들의 생가터를 정확히 밝혀내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효석 소설가와 전임 대통령 노무현 생가터의 경우처럼 원생가터를 벗어나 전혀 엉뚱한 자리를 택하여 생가를 조성해 놓은 사례들은 물론, 아예 생가 보전과 관리가 안된 경우들이 있어 필자를 당황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풍수지리의 재혈(裁穴)원리를 기본으로 삼아 문헌과 구전에 따른 자료를 종합 분석하면 원생가터는 결국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봉 기대승의 원 생가터를 정확히 짚어내는 과정에서도 예의 규명절차를 밟아서 비교적 정확히 찾아낼 수 가 있었다고 할수 있다. 문헌(정병연 저 고봉선생 생애와 학문 p108, 출생지편)을 근거로 해서 그 곳의 용세와 작혈(作穴)의 원리에 따라 밝혀낸 결과 오남재(吾南齋)자리가 바로 생가터로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즉,「고봉연보」29세조에 “정월에 물재공(고봉의 부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3월(?)에 집뒤 경좌(庚坐)에 장례를 모셨다”(상게서 p108)는 기록에 따라 그 곳 지세를 3회에 걸쳐 답사한 결과 ‘집뒤’라는 표현은 가옥의 바로 뒤쪽이 아니라 생가터로 뻗어 내려오는 용맥의 끝자락을 기준으로 해서 실측하면 그 묘자리가 집뒤로 표현되는 지점이었으므로 ‘오남재’ 터에 고봉의 생가터도 포합되어 있었음을 어렵쟎게 밝혀낼 수가 있었다.
오남재는 원래 물재공이 서울에서 내려와 살던 집의 인근에 훈도장소(서당)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는데 뒷날 중건하면서 지금처럼 확장하여 복원했으므로 생가터도 함께 포함된 자리로 추정하는데는 무리가 아니었다. 
원생가터의 규명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고봉 생가터의 명당요건
고봉의 생가가 ‘오남재’자리에 포함되어 있었음은 용진혈적(龍眞穴的)의 관점에 따라 명당요건을 분석한 결과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이제 생가터를 작성하기 위한 용세와 재혈의 관점에 따라 과연 고봉으로 하여금 신령스런 땅기운(地氣)을 받아 생득적으로 그렇듯 큰 인물의 요인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자리인가를 분석할 차례이다.

   
 

첫째, 용진(龍眞)의 관점에 따른 생가 분석
고봉이 땅기운을 받아서 잉태되고 출태된 자리를 짓기 위해 행룡(行龍)을 거듭해 온 산봉과 산맥의 형세는 주룡(主龍)으로서 손색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도>에서 보듯이 생가터를 이루기 위해 발달해 온 용맥은 멀리 호남 정맥의 도장봉(469m)에 두고 있었다.
도장봉에서 분지된 튼실한 용맥이 도마산(397m)을 일으켜 세운 뒤에 간괘맥(艮卦脈)으로 낙맥하니 생기있는 용맥으로서 위용을 갖춘다.
도마산에서 발달한 힘찬 용맥은 기복과 위이(??:좌우로 구불구불)를 거듭하면서 병풍산(822m)을 수봉으로 앉히고서 이내 기복(起伏:솟구쳤다가 내려섰다)을 반복하며 행룡한 끝에 생가터의 태조산(太祖山)을 빼어난 문필봉으로 세운다.
태조산에서 한가닥 용맥은 임곡동 쪽으로 분행되고 또 한가닥은 집터의 안산이 되는 용맥으로 분행되어 건너편 칠봉마을 뒷산을 만든다. 그리고 태조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간 용맥은 중조산을 세운뒤에 한가닥은 어등산을 향해 나아가고 건해(乾亥;서북쪽→동남쪽)로 낙맥한 내룡맥이 바로 생가터에 땅기운을 공급해 주는 주룡이다.
고봉생가를 작성하기 위한 용세(龍勢)의 특징은 태조산(太祖山)으로 부터 개장천심(開帳穿心)의 정룡(正龍)이 아니라, 크게 좌선(左旋)해서 나아가는 편룡(偏龍)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용의 품격을 규정하는 관점에 따라 격룡(格龍)을 할 경우 편룡 보다는 정룡을 더 우위에 두고 있지만, 필자가 심룡(尋龍)에 대한 연수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의해 그 격(格)의 판단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용이 나아가는 형세가 혈(穴)을 짓기 위해 그 행도(行度)가 통맥교구를 어떤 규모로 구성하느냐가 품격규정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혈 작성 교구행도의 규모가 같은 경우는 개장천심의 형세를 타고 진행하는 정룡(正龍)이 더 강세의 용으로 규정하는 것이 정격이다.
사례지에서 실사된 정보를 예로 들면, 같은 3태(胎) 교구의 양택 명당이어도 개장천심의 정룡으로 구성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편맥으로 작혈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터 보다 그 격을 높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기문 UN사무총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터 등 편맥의 형세이면서도 4태(胎) 교구행도에 의해 국중대혈로서의 증험을 보인 사례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제 고봉의 생가를 짓기 위한 용세의 형태가 그 결과변인이 되는 혈을 어떤 규모로 작성하고 있는지를 밝혀보아야 하겠다.

혈적(穴的)의 관점에서 보는 고봉의 생가
용세를 살펴서 그 격을 규정하는 심룡의 과정도 중요하지만, 용진의 지상 목표인 혈적(穴的)의 상태를 밝히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제아무리 강세하고 수려한 용세일지라도 그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참된 혈을 만들지 못하면 그 용은 허장성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수공부 13년에 용을 보아 그 진위를 가리는 안목을 지니는데 3년, 혈을 찾아 정확한 자리에 소점는데 10년을 공부하라고 했을 것이다.
필자는 고봉 생가터로 부터 거슬러서 용맥을 타고 등산에 임하여 그 행룡을 나경으로 정확히 측정했다.
그 결과 마무리의 박환(博換)에 따른 용의 행도는, 간인(艮寅:동북→서남), 갑묘(甲卯:동→서), 손사(巽巳:동남→서북)로 확인 되었다.
멀리 태조산에서 비탈져 내리는 맥이 건해(乾亥:서북→동남)의 양두태맥이고 임자(壬子)맥을 만나 거기서 좌선의 궤적을 이탈하지 않고 길게 진행되어 마무리 단계의 교구통맥이 간인, 갑묘, 손사로 연결되면서 3태(胎) 교구로 작혈되었으니 큰 자리의 명당이라 평가해서 부족한 점이 없다.
다만 건해, 임자 이후 간인, 갑묘의 행도가 3회나 반복되어 지기(地氣)의 약화를 불러온 행도요인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생가를 만들고 그 여기의 좌선 편맥의 여기(餘氣)로 성국이 된 좌청룡이 약세인 점 또한 보국면에서 아쉬운점이라 볼 수 있다.

매우 안정적이고 짜임새 있는 보국(保局)
보국이란 터를 중심으로 해서 주위의 보호막을 일컫는데, 고봉의 생가터를 둘러싼 사신사와 내명당과 조?안산 그리고 횡대의 우선수(右旋水)등 불수록 안정적이고 짜임새 있는 보국이다.
동북방에 수려하게 솟은 문필봉은 그 청기를 혈까지 공급해주는 지기의 응축장치로서 더할나위 없는 길사(吉砂)이다. 
그리고 생가 앞에 수평으로 펼쳐진 내명당은 정(靜)하고 안정된 보국으로서 손색이 없다.
이만한 양택 대지에 서린 서기어린 땅기운을 받고 잉태와 출태의 과정을 거친 고봉이야말로 이미 생득적으로 출중한 인물의 요인을 간직하고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렇듯 잉태와 출태의 총본산의 생가터가 서기어린 땅기운으로 충만했으므로 그 지령을 입고 태어난 고봉 기대승은 한 시대의 지성으로 그치지 않고 역사속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을 것이다.
동시대(同時代)를 살았던 인구중에서 잠재가능성과 재능에 있어 고봉과 같은 역량이었거나 그 보다 더 훌륭한 수준인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고봉만이 역사적 인물로 우뚝 서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그 요인을 인걸지령론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풍수지리학이 보내는 의미있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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