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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강미경 시인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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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06  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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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1943년 2월 16일 새벽 3시 26분, 조선의 청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망한다. 27년 3개월의 생애를 일본의 한 형무소에서 마감한 것이다. 그가 사망한 지 45년 만인 1990년에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다. 그는 독립을 위해서 만세 시위를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만세 운동을 도모한 적도 없다. 기미 독립 운동이 일어났던 때, 그는 생후 15개월 된 아기였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독립 운동을 도와준 적도 없다. 청산리 전투와 같은 전장(戰場)에서 총을 들고 독립을 위해 싸운 적도 없다.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그는 다만, 문학이 좋아서 시와 산문을 썼고 학교 교지, 문예지와 조선일보에 발표했을 뿐이다. 그가 시를 쓴 것은 북간도 용정에 은진중학교 때부터였다.(18세무렵)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로 편입했으나 그는 6개월만에 자퇴를 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린 까닭이다. 북간도로 귀향하여 용정 광명중학교로 편입한 윤해환은 윤동주라는 필명으로 「카토릭 소년」에 동시 몇 편을 발표한다. 그리고, 백석의 시집[호수]를 필사하면서 시에 열중하게 된다. 
 1937년 민족말살 정책이 한창일 때, 윤동주는 서울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을 한다. 부친의 바램을 저버린 동주의 고집이었다. 1937년부터 1941년 연희 전문시절이 동주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가 기거하던 기숙사로 쓰였다는 건물에 지금은 핀슨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건물 2층에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고 하여 그곳을 찾았다. 건물 앞에 윤동주 시비도 세워져 있다. 그의 기념관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가 사용했다는 책상과 연필, 필통, 가방과 모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유리 상자 속에는 그의 유고 시집이며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곳에 적혀 있는 설명 재료들을 읽고 또 읽고 책상에도 앉아보고.... 거기서 두어 시간을 머무르면서 그를 생각했다. 가슴이 아렸다. 

 그를 생각하며 가슴 아리지 않을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한국인들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뿐이겠는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추앙하고 있다.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북간도 명동촌과 무덤이 있는 용정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시인의 자리에 놓여있다. 그를 죽인 것은 일본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를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 것도 또 다른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그의 시를 우연히 읽게 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보다 그를 더 많이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 속, 미남 얼굴에 매료된 일본의 젊은 여자들이 북간도에 우리 보다 먼저 찾아갔고, 그의 관련 자료들을 발굴해 내기 시작했다. 그의 묘를 발견해 낸 것도 일본인 오무라 마쓰오 교수에 의해서였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일본의 이중성을 일찍이 1946년에 루스 베네딕트라는 미국의 인류학자가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미학에 탐미적인 일본인의 특질을 국화에 비유하고, 전쟁을 사랑하는 군국주의적 성향을 칼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칼에 의해 희생된 윤동주는 일본의 국화에 의해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연희 전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윤동주는 문학을 사랑했다. 해서 시를 쓰고 산문을 썼다. 그리고, 연희 전문의 문예부에 들어가 활동을 하면서 ‘문우’라는 문예지에 ‘새로운 길’과 ‘자화상’ 이라는 시를 발표한다.(1941년). 그리고, 조선일보 학생란에 ‘달을 쏘다’(1939. 1. 23.), ‘아우의 인상화’(1939. 2. 6.), ‘유언’ (1939. 10. 17.)이라는 산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발표했던 산문에서 그의 과감성과 용기를 읽어내야 할 것 같다. 특히 ‘달을 쏘다’의 마무리 부분에서 보인 표현을 보면, 겁 없는 청년의 대찬 기개를엿볼 수 있다.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겨누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武士)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라고 되어있다. 관심있는 몇 명만이 읽는 문예지도 아니고, 조선일보라는 일간지 신문에 이런 글을 발표한 것은 배짱이 두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유로 썼다고 하지만, 누구라도  “무사(武士)의 마음”이라는 표현과 “달을 쏘다”는 표현은 일제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도전하고 항거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윤동주가 22세에 쓴 글이다. 독립운동가이며 조선족 교육의 선구자였던 외삼촌 김약연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였을까? 안중근 의사에게 총과 탄환, 군자금을 대어주었던 외삼촌의 일을 모르지 않을 윤동주였다. 

 그러나, 일본 관헌은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고, 윤동주는 무사했다. 그리고, 그는 졸업 때까지 문학에 심취하여 블란서의 지드와 말라르메에 빠지고 프랑스 문학을 혼자 공부하기도 했다. 그가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 전문을 졸업할 무렵, 그는 졸업을 기념하여 우리말 시집을 내려한다. 19편 중에 몇 편('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은 일본에 저항하는 표현이 짙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말 말살정책이 한참 고조되어 있는 때에 우리말로 된 시집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염려하여 시집 발간을 보류하라는 은사님과 어른들의 만류가 컸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시집을 묶고 싶었던,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청년의 꿈은 포기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예반에서 활동할 때 늘 손에 등사기 잉크를 묻히고 다니던 동주였다. 동주는 자신의 육필로 시를 직접 써서 똑같은 시집을 세권 만든다. 은사 이양하 교수와 절친 정병욱과 자신이 한권씩 나누어 갖게 된다. 

 여기서 정병욱(서울대 교수-고전문학과 판소리 연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정병욱은 동주와 기숙사, 종로구 누상동,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하숙집에서 함께 방을 썼던 친구였다. 정병욱은 학도병으로 끌려가면서 고향의 노모에게 윤동주의 육필 시집을 맡긴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 잘 보관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노모는 동주의 시집을 항아리에 넣어 보자기로 싸서 마루장을 뜯고 그 속에 숨겨 둔다. 전남 광양시 망덕면 섬진강가 마루 밑에 무사히 보관되었던 동주의 시집. 학도병에서 돌아온 정병욱은 윤동주가 감옥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마음을 모아 친구의 유고 시집을 낸다.(총31편) 그렇게 해서 윤동주의 시집이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1948년 - 정음사) 정병욱이 아니었더라면 윤동주의 시집은 역사 속에서 스러져갔을 것이다. 윤동주의 육필 시집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 데에는 정병욱이 일등공신이다. 친구 덕분에 시집이 세상에 남게 된 윤동주는 그런 면에서 행운아이며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친구를 두어 생전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백아]에 나오는 知音이라는 고사가 있다.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안다는 말로서, 서로 뜻이 잘 통하는 친구 사이를 비유하여 쓰인다. 정병욱 교수가 바로 윤동주의 지음이었던 것이다. 시를 사랑하여 시를 쓰고, 시집을 내길 갈망했던 친구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준 친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친구의 소원 - 생전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대신 이루어준 정병욱교수, 동주의 시 5편을 수중히 숨겨두었던 절친 강처중도, 동생 윤일주도 모두 아름다운 영혼들이다. 죽은 사람은 말을 못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윤동주의 영혼이 간절히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그것을 이뤄준 사람들이 얼마나 어여쁜 천사들인가? 
 윤동주는 1941년 4월 2일 동경의 릿교(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2년 10일 1일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편입을 한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면서도 시를 썼다. 그것도 일본 땅에서 우리말로 시를 쓴 것이다. 그 때 쓴 시 다섯부는 강처중(연희 전문시절 절친했던 글벗)에게 송부한다. 

 당시 조선인은 "우리들은 제국의 신민(臣民)"임을 암송하도록 강요받고 있을 때였다. 일본은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며, 언어를 빼앗는 것이 조선민족을 말살시키는 급선무책이라고 믿었다. 그런 때에 윤동주는 일본 땅에서 조선어로 시를 쓴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카케다(武田)아파트(윤동주의 하숙방)에서 조선에서 조선어 과목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논란을 벌였다.(1943년 2월 초순) 조선문화의 유지와 조선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독립의 달성은 필수적이라는 것을 윤동주는 강조했다. 문학은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견지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여 민족의식 유발에 부심했다.(1943년 7월 중순) 같은 유학생들끼리 모인 자리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 중에 누군가가 밀고를 한 것인지, 하숙집 주인이 그리한 것인지는 기록에 없으나 윤동주는 두 차례에 걸친 그 발언으로 일본 경찰에 연행된다. 윤동주가 강처중에게 보낸 시 중에 '쉼게 쓰여진 시'에서 일본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여 표현했다. 그리고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라고 표현했다. 제국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며 강하게 저항하는 '이질분자', '불순분자'를 자처했던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시선으로는 극노할 표현이다. 황국신민주의로 조선인을 일본화하려는 일본의 시선은 윤동주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일본 대학에서 같은 학과 일본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동화되지도 않고 혼자 외톨이로 있었던 윤동주. 조선 유학생들이 같은 유학생들끼리 우리말을 쓰지 않고, 일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눈살을 찌푸렸던 윤동주였다. 그런 윤동주는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혼자였다. 외롭고 추운 유학생활은 더 춥고 어둡고 차가운 감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을 구상했다"는 명목으로 체포 - 투옥 - 옥사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는 19개월 동안 감옥에서 극심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밤마다 주사를 맞아야했다. 생체실험용으로 우리의 윤동주가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북간도 이주민의 후예다. 부유한 집에 장남으로 태어난 여리고 순전한 인상의 청년 윤동주. 그에게 죄가 있다면 감수성이 예민하여 시를 썼고,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한 것밖에는 없다. 부모가 가르쳐준 우리말과 글을 사랑한 죄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시를 자신이 어릴 때부터 써왔던 우리글로 썼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칼"의 시선으로는 그것은 엄청난 죄였다. 처단하고 제거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재경도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을 이유로 취조를 받고 징역 2년의 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감옥의 철창을 붙잡고 " 조선아, 조선아 ~~~ "라면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일본 땅에 학비를 내고 공부를 하러 온 유학생에게 일본이 가한 만행이었다. 일본은 "윤동주를 불온사상, 사양 사상 농후, 독립운동 도모의 혐의"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은 조선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미국 진주만 침략으로까지 이어졌었다. 기세충천했던 일본 제국주의 칼날에 우리의 어린 청년은 힘없이 죽었다. 그들의 대륙 침략과 대동아전쟁, 세계 평정이라는 기치 아래 풀잎 위에 이슬처럼 스러져간 윤동주.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그의 친지와 문우들의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 시집 속에서 불사조로 살아났다. 일어로 번역된 그의 시가 일본에서 젊은 아가씨들에게 사랑을 뜨겁게 받기 시작했다는 것, 그런 한류 열풍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해져 들어왔고,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시집은 7개국어로 번역되어 80여개국에 전해져 있다. 윤동주는 세계인들이 읽고 누구나 전율을 느끼는 시인이 되었다. 누가 윤동주를 죽였는가? 누가 윤동주를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칼은 윤동주의 신체적인 생명을 죽일 수 있었지만,  조선어를 사랑하는 민족혼과 민족정신은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시와 우리글과 말. “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1941. 5. 31)라고 그의 시 ‘십자가’에서 노래했던 시인. 별이 오르는 밤에 그는 하나의 더 큰 별로 우리들 가슴에 항상 살아있을 것이다. 아니, 전 세계인의 가슴에 더.... 그의 민족혼과 함께. 나도 오늘 해처럼 환하게게 빛나는 윤해환의 시 ‘또 다른 고향’을 다시 읊조려 본다. 

   또 다른 고향
                         윤동주/윤해환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 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194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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