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프
풍수지리 그 증험적 진실을 밝힌다증험사례지로 떠나는 풍수기행 9
정일균 선생  |  koreain@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10.06  17:50:5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LIFE 연재기획(26)풍수지리 정일균 선생

 

풍수지리 그 증험적 진실을 밝힌다.
증험사례지로 떠나는 풍수기행 9

 

외가를 생가로 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의 생가는 남다르다.
본가가 아닌 외갓집을 생가로 두었기 때문이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민속마을 서백당(書百堂:주요민속자료 23호)이 바로 회재 이언적의 외가이다.
따라서 이번 풍수기행은 경주의 양동마을과 서백당에 관한 내용을 풀어가면 된다.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도) 四大地  양택중 하나인 양동마을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2)은 조선에서 양반선비가 살만한 이상적인 고장으로, 경북 예안의 도산, 풍산의 하회, 임하의 내앞(川前), 내성의 닭실(酉谷)을 꼽았다.
이는 일반 풍수가에서 지목한 삼남 四大길지인 경주 양동마을, 풍산의 하회, 임하의 내앞, 내성의 닭실과 한 곳만 빼 놓고 똑같다.
바로 이번 풍수기행의 증험사례지인 ‘양동마을’이 그 한군데에 해당된다.

이중환의 양택길지 선정 기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선비의 가거지(可居地)로 본 이중환의 특징적 기준이 매우 흥미롭다.
그는 첫째 지리(地理), 둘째 생리(生利), 셋째 인심(人心). 넷째 산수(山水)를 기준으로 꼽았다.
地理는 풍수지리적 조건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수구(水口)를 중시했다.
水口란 명당의 국세내(局勢內)의 물들이 모여 한 곳으로 빠져나가는 출구(出口)를 말한다. 그 곳은 청룡과 백호자락이 교쇄 되어서 명당 권역의 물이 흩어지지 않고 오롯이 한길로만 출수(出水)되는 지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구가 넓게 열려있거나 아예 형성되지 않으면 명당기운이 유실(流失)되기 때문에 수구는 잘 닫혀 있어야 지기(地氣)의 지킴이 기능을 다하게 된다고 해서 이를 강조했다고 본다.
    
       

   
<회재 이언적의 초상>


水口를 풍수지리의 다른 용어로는 파(破)라고도 한다. 국세내의 모든 살기를 한데 모아 파쇄시키는 곳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生利는 경제적 조건으로서 먹고 살 수 있는 재리(財利)가 조달될 수 있는 것이고, 人心은 그 양택길지에 사는 지역주민들의 마음씨이며, 山水는 지역경관의 아름다움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기준에 미달되었거나 부합되지 않는 곳이 ‘양동마을’ 이었다고 평가되어서 四大길지에서 제외시켰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즉 이중환의 기준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유교적 가치관을 반영시켜서 설정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는 풍수지리의 본질적 요건에 따라 선정한 四大 양택길지와 사뭇 다르다.
이에 필자의 견해를 곁들여서 조심스러운 이견을 제기하기로 한다.
이중환의 길지 선정은 이미 개촌(開村)이 되어 人口가 모여서 삶을 누리고 있는 곳만을 가려서 양택길지로 선정했다는 제한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문제를 안겨준다.
그가 제시한 4가지 기준에서 人心을 제외 하고는 풍수지리적 관점과 상통한다. 그리고 山水는 地理와 겹치는 기준이라는데 따른 문제제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풍수지리적 요건이 갖춰지면 주위경관의 아름다움은 따라서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조성된 촌락을 뛰어 넘어 지리와 생리, 산수에 걸맞는 땅을 새로 찾아서 길지의 대상으로 설정했어야 더 미래지향적이고 적극적이며 개척적인 제안이 되었을 터이다.
그리고 풍수지리 요건의 핵심을 水口에 둔 것은 한계성을 자초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환이 水口를 강조한 까닭은 명당을 감싸고 도는 청룡과 백호가 마침내 포응하듯이 서로 교쇄하며 울타리를 견고하게 마무리해야 함을 강조하는데서 그 연유를 찾게 되는데 이는 진혈(眞穴:명당)의 핵심요건인 地氣 응결?승기처의 중요함을 간과한 것으로 보여진다.
풍수지리서의 원전(原典)이라고 하는 ‘청오경(靑烏經)의 용호론에서도 팔다리(청룡, 백호)의 건강한 것이 오장의 기(氣)가 왕성함만 못하고, 담장 튼튼한 것이 동량(棟梁)의 완전한 것만 못하다고 했쟎는가.
물론 명당의 진혈요건이 완전하고 주위의 수사(水沙)가 두루 갖춰지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풍수에서 완전한 땅이란 없는 법)라 했다. 또한 경(經)에 이르기를 체생지사(?生枝死:혈자리는 참되고 주위의 사격을 갖추지 못함)는 발복이 따르나 체사지생(?死枝生:용호가 갖추어도 참된혈이 아님)는 발복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용의 참되고 혈의 적중함을 중히 여겨야 풍수의 본질인 서기어린 땅기운의 혜택을 누릴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회재 이언적의 생가인 서백당>

  
아무리 水口가 잘 닫히고 용?호가 혈을 잘 감싸듯해도 명당자리를 정확히 찾아 양택을 짓지 못하면 이른바 풍수지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지나치지 않다.
필자는 위에 열거된 양택길지 5개 지역을 2~3회에 걸쳐 간찰한 바 있다.
이들 양택지 모두가 용진혈적의 핵심 원리를 만족시키고 있음이 분석?평가 되었다.
양동마을 역시 그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명당진혈의 요인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요인이라면 닭실, 양동, 도산의 터는 우선(右旋: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선회)작국인데 비해서 내앞, 하회는 좌선(左旋) 작혈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정보의 분석자료가 없어서 인걸지령론의 단험이 증험으로 얼마만큼 발현되었는지를 여기에 제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위 5개 길지를 생가로두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밝혀보면 그 응험에 따른 진혈명당의 진위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리라 본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했다.
인걸지령론의 가설이 인물 배출의 증험으로 검증되었을때 비로소 명당은 명당으로서의 진실한 옷을 입고 당당히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양동마을’은 이런 관점에서 四大가 아닌 5大 양택명당으로 바꾸어서라도 길지의 반열에 올려야 된다고 믿는다. 명불허전 명당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그 땅의 地氣를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 걸출한 인물로 배출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회재의 생가 서백당의 풍수지리적 평가
양동마을이 삼남의 양택길지라면, 회재의 생가인 서백당(書百堂)은 그 핵심의 진혈자리로 평가 되어야 한다. 우선 그 명당 자리에서 걸출한 국중 인물이 나와 인걸지령론의 증험이 발현된 것에서 확신에 따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양동마을의 유래와 명당요인을 밝혀 볼 차례이다. 양동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형으로 이름난 곳이다. 그래서 풍수지리학에서도 자주 언급된 곳이기도 하다.(이몽일의 ‘한국풍수사상사’, 김광언의 ‘풍수지리’, 최창조의 ‘한국자생풍수’ 김두규의 ‘우리땅 우리풍수’)
이 마을 명당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다.
원래 양동은 풍덕유씨(豊德柳氏)가 살던 곳이었다. 이곳 입향조(入鄕祖)인 손소(孫昭; 1433~1484)가 25세 되던 해 유씨 집안의 복하(復河) 규수와 결혼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서백당의 집터를 고를 때 지관(地官)이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다. “이 곳은 물(勿)자 형국의 명당이다. 물자(勿字) 형국에서는 땅기운(地氣)이 응집해있는 勿자의 어깨 부분이 혈이다.
이 집터에 뒷산(현무봉)의 혈맥이 모이는 곳이므로 3명의 현인이 날것이다.”
실제로 그 후 이곳에서 6년만에 손소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18현에 든 우재 중돈(仲敦)이다. 손소의 딸이 여강(지금의 여주) 이씨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딸이 친정집에서 잉태와 출산을 했다.
그가 바로 훗날 동방 5현에 꼽히는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당시에는 혼인한 신부가 친정에서 1년간 묵히는 관습이 있었고 그 때 임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재는 손씨 집안에서 보면 외손(外孫)이다. 그 후 외손 발복을 막기 위해 친정에서 해산할 경우 안채를 내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두규,‘우리땅 우리풍수’ p283~284 참고)

왜 서백당에서 인걸이 배출 되었을까?
서백당 터는 분명 우선작혈(右旋作穴)의 이태교구(二胎交?)의 명당터임이 간산결과 밝혀졌다.
현무봉인 설창산에서 낙맥한 용맥을 실측한 결과 작혈교구도는, 손진(巽辰:동남→북서) 묘을(卯乙:동→서) 간축(艮丑:북동→남서) 축입혈(丑入穴)의 행도(行度)를 밟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터는 진혈에 드는 명당 길지라는 것이다.
<산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룡은 서백당터에 지기를 응결,승기케 하는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회재 이언적이 현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생득적(生得的)요인을 지니고 태어나게 한 서기어린 땅기운이 충만하게 감도는 터가 바로 서백당 즉 그의 生家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한 명터에서 신령스런 땅기운을 받고 잉태와 출태를 기했으니 회재 이언적은 역사적인 인물로 우뚝 설 수 있었다고 믿는다. 손소의 차남 우재 중돈 또한 마찬가지리라.
회재는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공자의 기제일에 온 백성이 추모제를 행한 18현에 드는 군자였다. 1514년(중종5년)에 문과급제후 관로에 진출 사헌부 지평, 밀양부사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1542년 이조, 형조,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을사사화의 여파인 양재역벽서 사건에 모함으로 연류되어 강계땅에 유배된 후에 병사했다.
사후(死後) 20년에 옥산서원이 세워져 그 곳에 제향되어 지금도 회재의 뜻을 기리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 일행도 회정길에 옥산서원에 들러 회재의 넋을 기리고 그의 올곧은 족적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부제학 시절 중종 36년 4월에 올린 ‘1강9목10조’의 상소문에 실린 국가의 대본과 정치강령을 생각하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했던 고귀한 경륜을 곰곰히 되새겨 보았다.

   

<회재의 뜻을 기리고 그의 위패를 모신 옥산서원을 찾은 필자(앞줄 중앙○표)와 동호인들 (편액은 추사의 글씨)>

보물 제586호로 지정된 ‘이언적 수필고본’
이 보관된 서원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휘호이니 역사의 흐름속에서도 승계되는
선비정신의 격조높은 향기는 후대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다.

옥에도 티가 있다.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했던가. 그렇듯 진혈명당의 반열에 올라 있는 ‘양동마을’도 완미(完美)하지는 않고 결합미를 남겨 놓은 조물주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안산(案山)이 너무 가까운 탓으로 내명당(內明堂)이 없으니 말이다. 외명당(外明堂)은 드넓기 짝이 없다.
그나마 안산과 혈장사이로 내당수가 좌선으로 흐르니 우선작혈의 서백당(또 다른 명당터)의 배룡수로서 기능을 다하고 있다. 해발 80m의 높은 지대에 터를 닦게한 그 지관은 분명 통맥재혈법을 적용했을 것이라 믿으니 필자의 재혈법과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상통함을 확인했다면 자기충족적 예언일까. 그래도 물자(勿字)는 뒤집어 씌여진 勿로 해석해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를 남겨 놓을 수밖에……. 「물(勿)자 백호 다(多)자 청룡」이라 했쟎는가. 참된 혈이긴 하나 내명당이 좁거나 거의 없을 때 그 혈명(穴名)을 목마를 갈자(渴)를 붙여서 짓게 된다.
낙맥하는 용맥이 진손(辰巽)이고 내명당이 없는 서백당의 진혈은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이라 부르면 어떨까.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모양’의 혈명을 되뇌이며 ‘양동마을’의 간산에 마무리를 지었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언론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20길 15 건설회관 2층 (우)04520  |  대표전화 : 02-771-1265  |  팩스 : 02-771-1266
등록번호 : 서울중 라 00573  |  발행·편집인 : 박재진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진
Copyright © 2022 월간 한국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