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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여행이육사 시인을 찾아서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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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5  14: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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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여행
- 이육사 시인을 찾아서 -                           

            
강 미경(시인, 여행작가)

   
 

깊은 눈이 푹푹 쌓인 겨울. 안동을 찾아갔었다.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이육사 문학관으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은 하회마을에서 그곳까지의 거리가 39km라고 일러주었다. 도산서원도 포기한 채 부지런히 달려갔으나 문학관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오후 4시 45분. 안동시청에 문의하니 동절기는 관람시간이 4시 30분까지라는 답변이었다. 2014년 1월초였다. 허탈한 심정을 앉고 우리들은 안동시내로 돌아와야 했다. 부모님과 여동생, 아들과 함께 한 여행길. 안동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어느새 어둠이 사방에 내리고 있었고, 저녁 어스름 속에서 이육사 시인을 생각했다.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서 멀리 안동까지 찾아갔으나 만날 수 없었던 이육사 시인이 야속하기만 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 ‘광야(廣野)’를 생각하며 우리들은 안동을 떠났다.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로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李陸史)는 저항시인이라고 했다. 일제에 항거하는 시를 저항시라고 했다. 그게 내 지식의 전부였고, 국문과 현대시 전공시간에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윤동주와 이육사를 우리나라 대표적인 저항시인이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윤동주는 자아성찰(自我省察)의 시인이지 저항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육사를 대표적인 저항시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 강의를 들은 지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리고, 2015년 11월 월간 [순국]誌에 발표한 윤동주 시인에 관한 글에서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고찰하며 그가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사실을 글에 썼었다. 

 그리고 다시 이육사 시인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의문이 한 가지 생긴다. 의열단에 입단하여 직접 총을 들고 일본과 싸웠던 이육사였다. 1926년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었고, 1932년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1기생으로 초급 군사 간부 교육을 마치기까지 했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한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형제 이원일, 이원조와 함께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1년 7개월 간)를 겪었다. 1931년 대구격문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1934년 3월에 군사간부학교 출신이란 사실이 드러나 다시 구속되어 3개월의 옥고를 겪는다. 북경으로 다시 가서 국내에 무기를 들여올 계획을 세우다가 1943년 7월에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에 참여하려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네 번째 구속이다. 북경으로 압송된 후 일본총영사관에 구금, 베이징 감옥에서 1944년 1월 16일에 그는 옥사한다. 순국이다. 지병이었던 폐렴이 악화된 것이 사인(死因)이었다. 네 차례의 옥고 때마다 고문으로 얻어진 결과였으리라. 얼음장 같은 차가운 감방에서 그는 온몸에 피멍이 들고, 칼에 찔리고 일제의 총칼에 신음했을 것이다. 

 의열단이라는 적극적인 항일투쟁 단체에 속하여 일선에서 총을 들고 일본과 맞섰던 이육사는 독립투사였다.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義士가 총을 들고 일본과 싸웠던 것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였다. 무관학교에서 군사 간부 교육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그의 항일 무력 투쟁은 의사(義士)라는 칭호를 받아야 마땅할 것 같다. 윤동주 시인, 이상화 시인, 한용운 시인, 심훈 선생 등 그 시대 지식인들 중에 시대를 아파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모두 시대를 아파하며 시를 쓰고 소설을 썼다. 비유와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일제에 저항하고 해방을 열망하는 시를 썼다. 글을 사랑하고 글줄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지식인의 양심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W. 워즈워드가 말했던 것처럼, “ 인간은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그들은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었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현하지 않으면 숨이 막혔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어떤 시인들도 직접 총을 들고 나선 이들은 없었다. 의열단에 들어가 적극적인 투쟁을 한 이도 없었다. 그런데, 이육사에게는 의사나 열사라는 칭호가 붙여지질 않았다. 그에겐 윤동주 시인보다 등급이 낮은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968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2016년 6월 16일)에 나는 안동에 다시 내려갔다. 이육사 시인 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에 둘러보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풀고 싶은 마음 하나로 안동을 향해 달렸던 267.5km의 먼 길. 도산서원에서 4.6km 더 운전하여 갔으나, 공사 중이었다. 기념관 건물은 모두 헐렸고 철근들이 세워져 있었다. 몇 십억 예산을 들여서 다시 기념관을 조성한다는 응답이었다. 두 번째 찾아간 여행길도 또 어긋나 버렸다. 허망한 마음으로 경북독립기념관으로 향했다. 이육사 문학관에서 안동 시내를 통과하여 35km 정도 운전을 했던 것 같다. 그곳도 공사 중이었다. 안타까워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젊은 아가씨가 나와서 책을 한 권 건네준다. <史蹟으로 보는 안동독립운동>(지식산업사)이라는 책이었다. 안동시 구역 약도를 펴 보이면서 내앞 마을, 백하구려, 김동삼 생가 터, 삼백당(3차 선성의진 의병소), 봉정사(안동의병 창의 논의지), 안동시장(3?1운동지), 김동삼선생어록비, 이원일?이육사 생가터를 둘러보라고 권한다. 

   
이육사 시인

 6월 햇살이 따갑게 우리들을 쪼고 있다. 양산을 써도 햇살이 얼굴을 파고드는 것 같다. 그러나, 2년 6개월을 벼르고 내려온 안동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경북독립기념관 옆에 있는 내앞 마을과 백하구려를 둘러보고 봉정사를 거쳐 권유를 받은 곳을 모두 찾아다녔다. 오전에 들렀던 도산서원과 이육사 기념관을 다시 찾아 간 것이다. 가는 길에 안동댐 옆에 김동삼 선생의 어록비가 있었다. 안동댐의 시원한 물줄기가 한낮의 고단함을 식혀주는 듯했다. 봉정사와 삼백당에서 의병들 생각을 잠시 했지만, 내 마음은 이육사 선생의 생가터를 찾는 것으로 치달았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706번지. 이육사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엉뚱한 곳에 가서 헤매고서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이육사 시인의 흉상(胸像)과 ‘청포도’라는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詩碑)를 만날 수 있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세 번 찾아가서야 그의 족적(足跡)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 고마움이 밀려온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아시나요? 이육사 시인님?”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으로서 당신을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따갑던 햇살도 시들어가고 어스름 저녁이 내리고 있는 그의 생가 주변은 폐지처럼 초라하기만 했다. 저만치 그의 기념관을 공사하고 있는 광경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의 기념관이 다 완공되면 다시 안동에 내려와서 둘러볼 것이다. 그의 문학이 시단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서, 그의 활동이 독립운동사에 남긴 성과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안동과 대구, 서울, 북경을 뛰어다니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의 40년 짧은 인생길이 후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직접 총을 들었던 그의 행동 실천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절의 오행>에서 그는 “무서운 규모가 그의 형제들을 키워주었다”라고 했다. 여러 독립운동가(이광호, 이열호, 이영호, 이원영)를 키워낸 원촌마을에서 그는 1904년 4월 4일 태어났다.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이다. 친가 쪽은 향산 이만도를 비롯해 독립운동가를 길러냈고, 모친 집안도 의병장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그 영향이었는지 그의 형제들은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그의 형 이원기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장진홍 의거)으로 검거되어 고문을 받고 불구의 몸이 된다. 이육사의 집안은 그랬다. 아마도 퇴계 이황선생의 경(敬)사상 - 경천애인(敬天愛人) 사상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릇된 것을 보고 그릇되다고 말하며 바로 잡으려고 행동으로 옮긴 이들이 그들 형제들이었다. 

 일본군을 향해서 총을 쏘면서도 시를 써던 시인(詩人), 이육사(李陸史).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시인은 동지(同志) 윤세주가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것을 절규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의(正義)를 말하고 싶었을 이 육사. 본명인 이원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구형무소에 구속되었을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자신의 예명으로 쓴 것을 보면 그는 대륙의 역사(陸史)를 잇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1930년에 <조선일보>에 ‘말’이라는 시를 발표했다는 사실도,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1937년 윤곤강, 김광호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한 것도. 그가 시를 짓고 동인지를 발간하고 때로 신문사, 잡지사에 논문과 시나리오 등을 쓴 것은 오직 한 가지로 집중되는 일이었다. 그가 사망한 후 신석초가 그의 유고시집, <육사시집>을 내준다. 그 중에 ‘광야’, ‘청포도’, ‘광야’, ‘교목(喬木)’ 등에 나타난 그의 광복에 대한 염원은 그의 저항정신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이라고 명명(命名)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간절함으로 이미지의 시를 썼고, 시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언어의 천재 시인, 이육사.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와 비유로 형상화의 극치를 보이는 여러 시어들과 함축성 속에 녹아 있는 오직 한 가지 - 광복에 대한 열망과 독립의지였음을 강조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행동으로 실천한 시인, 이육사님. 당신을 우리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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