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편집부  |  koreain@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2.05  16:29:1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김규면 선생

(자료제공: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 044-202-5771)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규면(金圭冕, 1880. 3. 12.?1969. 2. 2.) 선생을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김규면 선생은 1880년 함북 경흥의 빈농가정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통 학문을 익힌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한성사범학교와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교원과 무관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선생은 생업을 잇기 위해 원산으로 이주하였으며 당시 독립교회 선교사인 펜윅(Malcom C. Fenwick)을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907년 선생은 가족과 함께 훈춘(琿春)으로 망명하여 대한기독교회 소속의 전도사로 활동하며 국내의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 등에 가입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국내에 선교총부를 두고 있는 교단을 대상으로 매년 포교자 명부를 신고하도록 하는 포교규칙을 공포하였다. 대한기독교회가 포교규칙에 굴복하여 따르기로 결정하자 선생은 함경도, 만주 및 연해주 일대의 교인들을 이끌고 대한기독교회를 떠나 ‘대한성리교회’를 만들고 복음서를 판매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며 현해주와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과 연대했다.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공에 맞서 대한성리교회 교도들이 중심이 된 ‘대한신민단’을 창설하고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대동단결’을 주문하였으며, 1919년 한인사회당 주도로 대한신민당과 사회혁명당이 통합되자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김경천이 조직한 ‘창해청년단’이 일제에 매수된 마적들과 전투를 벌이자 명예단장 신분으로 군수품과 인력을 조달하였다.
1922년 선생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한인 무장부대가 해산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윤자영 등과 함께 상해청년동맹회을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했다.
1924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소련 당국에 대한 자금지원요청 교섭을 맡았으나 실패하자 사임하였다.
1925년 선생은 사회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선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중국을 떠나 연해주로 돌아왔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며 연해주 지역 빨지산 위원회 지원을 담당하다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에 위협을 받아 모스크바로 이주하였고, 그 이후에는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였다.
정부는 2002년 김규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규면(金圭冕) 선생

1880. 3.12.~1969. 2. 2. 독립장(2002)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언론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로 16 대한체육회관(무교동) 7층  |  대표전화 : 02-771-1265  |  팩스 : 02-771-1266
등록번호 : 서울중 라 00573  |  발행·편집인 : 박재진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진
Copyright © 2018 월간 한국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