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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다카시 박사를 찾아서
강소이 (시인, 여행작가)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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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05  15: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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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다카시 박사를 찾아서

 

강 소이(시인, 여행작가) 


지난 1월 나가사키 원폭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참혹했다. 

원자폭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나가사키가 잿더미로 변하고 폐허가 되었다. 일본은 지구 유일의 피폭 국가이다. 나가사키‘원폭 자료관에는 재로 변한 건물과 파괴된 철로, 우라카미 성당, 불에 녹아버린 묵주알, 성모상, 목이 날아간 성인상(聖人像), 불에 타버린 시신 더미 등……. 처참한 참상들을 찍은 사진들이 즐비했다. 전시물들을 둘러보면서 마음이 몹시 냉정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원자폭탄의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반일 감정이 가득한 눈으로 봐도‘같은 인간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일본은 그 자료관을 통해서 세계만방에 자신들이 당한 피해를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되게 된 과정이나 이유, 반성 등은 전혀 읽혀지지 않는 곳이었다. 씁쓸한 기분과 원폭의 공포를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기던 중에 유리벽 속에 걸린 사진 한 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 누워 있다. 이불을 덮은 채……. 그는 누운 채 종이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공중에 종이가 힘을 받지 못해서인지, 딱딱한 판자로 종이를 받쳐 놓고 두 팔을 공중으로 뻗은 채 글을 쓰고 있는 광경의 사진이었다. 일본어에 까막눈인 나는 일본어 밑에 쓰여 있는 영어 해설을 읽고 난 뒤 그게 무엇을 하는 행동인지 알 수 있었다. 
 ‘나가이 다카시’그는 누구일까? 누운 상태로 글을 써서 14권의 저서를 남겼다는 설명 앞에서 마음이 뜨거워진다.
옆에 동행한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 정신이 바로 저런 거야” 책상에 앉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글을 써서 14권의 저서를 남기는 불굴의 의지. 참 놀랍다.” 원폭 기념관에서 보았던 모든 전시물들 중에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게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집필 자세였다. “와,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귀국하여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에 대해 공부를 해보니, 그는 작가가 아니었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방사선학을 전공한 의대 교수였으며 의사였다. 그는 조용한 성격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조용히 연구에 몰두하는 의학자였다. ‘일본 방사능 의학의 개척자’로 인정받을 정도로 연구에 몰입하다가 백혈병에 걸릴 정도의 열정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지성인이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방사선 위험 수칙을 지키지 못한 채 무리한 나머지 백혈병에 걸린 의학인 이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 되던 날, 그는 그의 연구실에서 X-ray 필름을 선별하다가 원폭을 맞아 오른쪽 두부 동맥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고 피투성이로 쓰러진다.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이미 만성 골수성 백혈병에다 원자병까지 얻게 된 것이다. 
 그가 원폭을 맞은 날에도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원폭 후, 3일 만에 귀가해 보니 아내는 재로 변해있었다. 아내의 손목에 묵주도 열에 녹은 채……. 그는 타다 남은 양동이에 아내의 뼈를 추려 담아 묻어주면서 오열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슬픔에 젖어 있을 틈도 없이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피폭자들을 치료해야했다. 그는 남은 의료진들과 구호활동을 벌였던 보고서를 책으로 묶어 미국 국무성에 제출했다. 처참했던 사고 현장을 가감 없이 생생하게 기록한 보고서였다. 그의 ‘활동보고서’ 원고를 검열했던 미국 국무성은 상상을 초월한 원폭의 피해 상(象)에 경악했고, 그 책의 출판을 금지시켰다. 그날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모르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 보고서는‘나가사키의 종(鍾)’이라는 제목으로 히비야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고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리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의료진들과 피폭자들을 구호하는 일을 하다가 나가사키 역에서 결국 쓰려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자리보전을 하게 된다. 백혈병과 원자병이 그를 자리에 눕게 했던 것이다. 그는 병마와 싸우며 병이 나아지길 기도하기에도 여념이 없었을 텐데, 그는 자신의 병 치료 보다 글로 남기는 일에 더 전념하여 5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4권의 저서를 낸다. 일 년에 평균 2~3권씩은 책을 낸 셈이다. 자신이 시한부 생명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의사의 선택이었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겪었던 참상을 글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 지성인으로서의 고결한 사명을 뛰어넘는 그 무엇 - 원자폭탄에 대한 일류 최초의 기록이었다. 글의 주제는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과 원자폭탄의 참혹성을 알림으로써 다시는 인류에게 원폭의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평화 사상이다. 그는 쓰러지기 전 우라카미 성당 근처에 1평짜리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 기념관과 여기당>

 

 이런 것들을 한국에서 모두 미리 공부를 하면서, 나가사키 여행을 다시 가야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었다. 그의 기념관과 그의 처소였던 여기당(如己堂)을 꼭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가사키 평화 공원에서 우라카미 성당 쪽으로 쭉 따라 올라가면 된다는 것을 알고 갔음에도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평화공원엔 여전히 바람이 심하여 빗살이 우산 속까지 들이 치고 있었다.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물으니 자신은 모른다고 하며 가버린다. 우리가 구글(goole) 지도를 검색하며 발을 구르고 있을 때, 가버렸던 일본인이 다시 다가 오더니 “이쪽으로 올라가다가 신호등을 하나 건너면 나올 거다”라고  일러주었다.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인에게 길을 물으면 그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최선을 다해서 길 찾기를 도와준다. 얼마만큼을 함께 걸어주고 목적지가 눈에 보이면 “바로 저기다”라고 일러주고 자신이 가던 길을 간다. 그들의 친절을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놀라곤 한다. 

 그 일본인이 일러준 대로 7분쯤 걸은 것 같다. 걷다보니 속이 쓰려온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으니 당연하리라. 그러나 어디에 들어가 식사를 할 시간이 없다. 기념관이 5시만 되면 문을 닫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문 닫기 전에 그곳을 찾아가야하는 거였다. 뛰다시피 하여 헐레벌떡 기념관을 찾아 들어갔다.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기념관 안내 데스크에 도착하니 헉헉 거리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따뜻한 물을 권하다. 문 닫기 15분 전이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으며, 나가이 다카시 박사 기념관을 보고 싶어서 헐레벌떡 물어물어 찾아왔노라고 전했다. 안내하는 이들은 “찾아주어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숨도 돌릴 겸 우선 영상부터 보라고 한다. “한국어로 된 영상을 아직 만들지 못해서 미안하다. 영어로 만들었는데 보는 게 어떻겠냐?”고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해하는 그들의 태도에 사뭇 고단함이 풀리는 것 같다. 우리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5분짜리 영상을 보았다. 우리는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청하여 2번이나 반복해서 그 영상을 보았다. 나가이 다카시의 일생과 업적을 간단히 소개하는 영상이었다. 병상에 누워서 글을 썼던 그의 열정에 강하게 매료되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 속이 쓰린 것도 참아가며 우리는 기념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우리가 기념관을 둘러보고 문을 나설 때까지 일본인 안내인 2명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기념관에 머무른 시간이 1시간이 넘었던 것 같다. 그들의 퇴근 시간을 너무 늦춰버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가 기념관을 나오자 그들이 따라 나오면서 기념관 문을 잠갔다. 우리는 서둘러서 음식점을 찾고 싶었으나, 기념관 왼편에 있는 작은 집 하나를 가리키며, “매우 유명한 집이니 보고 가면 좋겠다.”고 한다. 검색을 통해서 미리 사진으로 보았던 ‘뇨코도’(여기당)였다. 다다미 2장이 깔린 1평짜리 움막이라고 했는데, 목조 건물에 일본식 기와가 얹어진 낡은 집이었다.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 정도 누울 수 있는 공간이다. 벽에는 묵주와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생전의 모습인 듯 한 사진이 걸려있다. 성모상과 십자가도 보인다. 
 
 대학 시절 시체 해부를 수없이 하면서 유물론에 빠졌던 그에게 모친의 죽음은 영혼과 사후 세계를 생각하게 했다. 그가 하숙집 주인의 딸(미도리)과 결혼을 한 것이 그를 가톨릭 신앙의 세계로 들어서게 했다. 1933년 군의관으로 만주사변에 종군 후 귀환한 후의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사유와 사후 세계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미도리와의 결혼 후, 아내의 권유로 영세를 받고 신실한 신자가 된다. 가톨릭에서는 낙태를 큰 죄로 본다. 그런 가톨릭 사상이 의사인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서 그는 원폭으로 인한 나가사키의 비극을 낱낱이 목숨을 다해 글로 고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생명, 건강, 인체를 연구하는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가진 의사였기에 그의 눈은 참상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백혈병, 원자병과 싸우면서 남긴 14권의 저서는 나가사키 원폭의 비애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일 감정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저작 활동에 대해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에서

 

우리 한국인들에겐 그의 공적(公賊)이 불편한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저서에 일관되어 흐르는 주제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었고, “핵무기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그는 글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간절하게 절규하고 있다. 원폭을 맞아 원자병에 걸린 자신의 몸이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묵도하며,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것을 모두 기록했다. 의사의 사명이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14권의 책들이 일본인들에게 전파되어 가면서 들어온 모든 인세를 나가사키 재건에 써달라고 市에 기증하는 그였다. 그의 시신을 나가사키 의대 병원에 기증하며 “원자병으로 죽은 사람의 인체가 어떠한지 연구하는 데 활용하라”고 하는 유언에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침략했던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지만, 나는 그의 국적을 떠나 한 사람의 의사-한 사람의 저술가로 그를 존경한다. 몹시도 불우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글을 써서 남기고자 했던 그의 정신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책상에 앉아 편하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가면서 글을 쓰는 요즘의 우리 작가들.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 속에서도 창작에 게으른 우리들이다. 저서 한 권 내는 것도 망설이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잿더미가 된 나가사키 폐허 속에서도 글을 쓰고 저서를 남긴 나가이 다카시 박사에게 참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그날, 그의 기념관에서 나와 음식점을 찾지 못했다. 10분 정도를 걸어도 평화 공원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저녁이 되자 비가 와서 그런지 오실 오실 한기가 느껴진다. 다리도 후들거린다. 목도 아프다. 결국 편의점에서 어묵을 한 개씩 샀다. 간단하게 속을 달래고 따듯한 국물이라도 마시고 싶은 간절함. 그러나 그곳엔 테이블 하나 없다. 서서 먹을 수 있는 시설조차……. 우리는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며 길에 서서 어묵을 먹었다. 이국 땅, 여행길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걸인이 된 듯 한 느낌. 그날 어묵을 먹으면서도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그의 사진이었다. 누워서 글을 쓰는 모습. 그 모습과 목숨을 바쳐가며 강조하고 있는 강렬한 메시지.

 "반전과 반핵”은 인류 모두가 동의하는 게 아닐까?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핵무기의 비극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평화 위에 평화 - 그것은 모든 인류가 원하는 간절함일 것이다. 그건 원폭을 맞은 일본인 한 사람만의 주장은 아닐 것이다. 

 여기당(如己堂)의 주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영결식에 2만 여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나가사키의 모든 성당과 교회, 사찰에서 그의 영결 시각에 동시에 종이 울렸다. “뎅 뎅 뎅~~~” 나가사키 시장의 지시도 있었겠지만, 종교를 떠나 일본인들은 여기당의 주인에게 존경을 모은 것이다. 나도 여기(如己)에 공감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반전과 반핵-평화 위에 평화가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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