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과학과 창조 경제”

김병동 서울대 식물생산과학부 명예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창조 경제와 국가 정책을 논하는 저명인사들이 청조경제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고 전제하는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창조 경제는 상식적 수준에서는 알 것 같다가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려면 막힌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 때의 녹색성장만큼이나 창조경제가 회자되는데도 막상 가시화 되는 것은 없고, 그러다가 남북통일과 동북아정세 안정으로 주제가 넘어가는 느낌이다.

세계 경제의 주도권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 그 핵심에는 과학기술의 주도권이 있다. 높은 산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그 진입장벽이 숨 가쁘게 가로막는 것처럼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개척된 길을 따라잡는 일은 열정과 패기로 극복할 수 있다 해도 전인미답의 경지를 찾아내는 일, 더욱이 그 다음에 이를 개척하여 국가 경제 수준으로 발전시켜 운용하는 일은 경험이 없는 나라로서는 감당하기 지극히 어려운 난관이다.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산업혁명과 마그나카르타를 성취하면서 해지는 날이 없는 대영제국을 만든 일이나 미국이 서부개척, 독립전쟁, 수많은 발명, 마천루, 원자탄, 인공위성, 인간유전체 등 인류사에 없던 일들을 이룩한 저력은 개척정신과 과학기술 주도권의 압도적 장악에 있었다. 그 선두권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만은 아닌 사례들이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만 경험이 일천하여 효과적으로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부분을 자각하여 과학과 문화를 구가하는 선진문명국의 조건들을 갖추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창조 행위는 시초에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말의 뜻 자체가 의미하듯 창조는 기존 개념을 뛰어넘거나 질서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쉽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거부당하게 마련이다. 초기에 그 창조적 가치를 평가하고 발굴하여 꽃을 피우게 하는 지혜와 실천력이 바로 선진국의 국력이다. 수십 년 지나서 소수의 전문가들이 알아차리는 경우에도 이를 증명하거나 실용화하는 데에는 또 다시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창조과학을 바로 창조경제에 대입하고자 하는 욕망은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그레고리 멘델’의 유전법칙은 35년 지난 1900년에야 재발견되었고 그 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식물과 동물을 개량하는 육종에 쓰이기 시작했다. 그 파급효과는? 오늘날의 분자유전학과 유전체학으로 연결되는 큰 학문의 강물을 이루었고 ‘맬서스’의 인구론을 잠재우며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켰다. 물론 ‘멘델’ 본인은 자기가 한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배되는 데 대한 죄책감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고 창조경제라는 용어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생명현상을 단백질에 기초하여 이해하던 시절에 비교적 새로운 핵산은 그 기능이 무엇인지 잘 몰라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졌었다. 그런데 ‘에이버리’라는 미국 학자가 실험을 통해 유전물질이 단백질이 아닌 핵산임을 발표했고, 그 역사적인 발표현장에 있었던 한 대학원생 ‘제임스 왓슨’이 핵산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알아내기 위하여 영국 케임브리지로 유학하여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이중나선 구조를 1953년에 제안하여 이 구조에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이 내재함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발표 당시에 소수의 과학자들만 이 내용의 중요성을 이해했지만 연구 방법의 부재로,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유전자를 분리해낸 것은 1970년대에나 가능해졌다. 그런데, 50년 지난 시점에는 인간 유전체 전체를 읽어내게 되었고 이에서 파생한 노벨상은 미국과 영국이 40여 개를 거의 독점적으로 휩쓸었다. 형질전환 옥수수, 콩, 면화 등이 세계적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 21 세기는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융합학문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분자생물학이 모든 생명과학에 공통 언어로 자리 잡으면서 의학, 약학, 식품, 농수산학 등 그 경계가 허물어질 뿐 아니라 정보 통신 나노공학과도 융합되고 있다. 무어의 법칙이라는 반도체 저장용량 증가 속도를 유전체 정보 증가 속도가 능가한지 여러 해 되었다. 인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주요 동식물과 미생물의 유전체가 읽혀졌고, 줄기세포 기술, 식물 형질전환 기술 등이 고도화되어 문자 그대로 생명+공학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꺾쇠호나선(Foldback Intercoil, FBI) 진핵산(DNA)이라는 새로운 진핵산 구조를 필자가 발견한 것이다. 실제로는 1985년에 첫 논문이 나왔으니 이중나선 발견 후 32년만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게재되지 않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정년퇴임을 앞둔 저자가 논문을 종합하여 2007년에 리뷰논문으로, 2008년에 책자로 출판하였으니 22년 만에 재발견 또는 부활되었다고 할만도 하다. 원초적 기초연구의 발견이 그러하듯이 현재의 연구 기술로는 직접 증명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어 새로운 방법의 개발을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이미 축적된 수많은 분자생물학 연구결과들이, 그리고 유전체에 기반을 두는 현재의 생명과학은 새로운 FBI DNA 개념을 받아들이는 시대로 성숙되었다.

일찍이 ‘크릭’이 말한바 ‘기능을 알려면 구조를 알아보라’ 했듯이 새로운 FBI DNA 구조 발견은 생물학의 여러 가지 근본적 문제들을 재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졌다.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한 분자생물학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현상의 더욱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지각변동은 불가피하다. 이 분야의 중심국 역할을 담당해 온 나라들은 이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여 이미 다양하고 치밀한 위기 대응책을 마련하여 실천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좋은 일도 준비가 미흡하면 위기이다. 문제의 당사자는 현직 시절에는 현실적인 농업생명과학과 인재양성에 시간과 정열을 다 쏟았고 막상 중요한 기초연구는 퇴임 후에야 후계자도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문제를 연구과제로 삼아 전념할 학자군과 학문 후계자군도 확보되어야 하고, 연구비와 연구여건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 민족과 나라에 주어진 새로운 역할을 감당할만한 지도체제와 문화사회적 분위기와 국제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각오가 빈약하다. 여전히 외부의 평가와 지도에 의존하며 흔들리고 있다. 모세가 노예생활로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어도 광야에서 40년을 헤맸고 꿀과 젖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단지 두 명만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준비된 젊은 세대와 함께 하나님이 이끄는 전투를 겪어가며 진입했던 일이 가슴에 와 닿는다. 거대한 세계사적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앞에는 창창한 미래가 놓여 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과학기술과 집단 지성과 한류 문화로 전열을 가다듬어 새로운 각오로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