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의 아이들

  
어제까지만 해도 조용하던 하늘에 하얀 눈이 내린다. 보고픈 사람이 갑자기 오는 것처럼 눈이 오면 얼었던 마음이 봄날처럼 설레기 시작한다. 지금도 아이처럼 눈 오는 날을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사춘기가 시작되려고 하는 가슴 뛰는 내 삶의 시작이 오늘처럼 눈 오는 날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얀 눈이 나리는 새벽, 용석이를 만났던 그날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과 헤어짐을 가르쳐 주었고 행복과 슬픔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준 그런 잊어버릴 수 없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용석이는 그 당시 마산고등학교에서는 제일 잘생긴 남학생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웃는 얼굴에 눈만 껌벅거려도 인기 있던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인공 그레고리 팩처럼 귀태가 온 얼굴에 넘쳐흐르는 미남이었다. 용석이 엄마와 누나도 지금의 미스코리아보다 더 잘생긴 것을 보면 식구 전체가 미남 미녀의 집안인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면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어울려서 노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그 시절인데도 용석이 엄마와 용석이 누나는 용석이와 같이 노는 것을 별 싫어하지 않았고 집에 오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마 용석이 엄마나 용석이 누나가 보기에도 내가 다른 여학생보다 순하게 보이고 착하게 보였던가 싶었다. 하긴 그때만 해도 세상의 나쁜 물은 조금도 묻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부끄러워 고개도 마음대로 들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마음대로 못하는 보기에도 조용한 아이였어니까.
   우연이도 용석이 집은 학교 가는 길 옆에 있었고 대궐같이 우뚝 선 큰집에 꽂이 만발하였다. 빈부의 차가 심하던 그 당시에 아버지가 부자인 것 같았다. 내가 용석이를 알기 전에는 저런 집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궁금하고 부럽기도 하였지만 용석이를 알고부터는 우리 집같이 편안하기도 하였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려면 우연이도 용석이 집을 지나야만 우리 집을 가곤 했다. 그래서 용석이와는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용석이도 내 마음같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자기 집 앞에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았다. 길가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용석이를 생각하면 학교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빨리 만나 보고 싶은 생각 때문에 내 마음은 뛰었던가 싶었다.
   그냥 집에 가기가 싫어질 만큼 나도 용석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많아지고 어느덧 용석이 식구들과 가까이 되어 용석이 집 대문을 스스럼없이 열고 들어가는 용기가 생겼을 때는 용석이의 에쁜 엄마도 꼭 우리 엄마처럼 학교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배고프냐?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이것저것 잘 챙겨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면 집에는 빨리 가지 않고 용석이 집에서 놀다가 늦게 우리 집에 가는 날이 많았다. 용석이하고 있으면 괜히 가슴이 뛰고 꿈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어느 대학을 갈 것인지? 다가오는 미래는 무엇을 할 것인지? 꿈과 현실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춘기의 아이들은 하늘 끝까지 고무풍선을 띄워놓고 놀았다.
   그런데 그해 겨울, 첫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던 오늘 같은 날이 왔다. 수십 년 만에 처음 눈이 많이 왔다던 마산의 도시는 길이 보이지 않고 너무나 하얀 세상이 되었다. 그날 새벽에 나는 몰래 집을 나와서 용석이와 둘이서 다니던 학교 앞에서 약속이나 한 듯 꿈같이 만났다. 하얀 세상이 다 우리가 만든 세상처럼 좋았다. 그랬지만 이유를 모른 채 그 뒤론 학교에 갈 때도 용석이 집을 지나서 집에 올 때도 웬일인지 보고 싶은 용석이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새벽녘에 뒤따라온 아버지가 용석이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너무나 바보같이 착한 아이들이었나 보다. 몰래 만날 수도 있었는데....
   그 다음 해 내가 아버지를 떠나 공부하려 서울에 올라왔을 때도 용석이는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 곁의 남자라면 무우 베듯이 베어버리던 우리 아버지 이젠 영영 아버지도 없는데도 아직까지 용석이는 소식이 없다. 그러나 해마다 찾아오는 하얀 겨울눈은 지금도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용석이의 모습이 아름다운 되새김을 만들어주고 눈보다 더 하얀 그때의 착한 소년 소녀의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