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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좋으나 죽는 사랑
김정윤 목사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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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7.07  09: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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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좋으나 죽는 사랑
- 성경으로 세상 보기 -


선지영성신학원장 김정윤 목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부터는 양손을 머리 위에 올리거나 엄지와 검지의 손가락을 모아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면서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또 친구 간에 사랑을 전하고 확인하는 것이 일상속에 녹아져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 된다. 또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고 정치나 경제나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서 자유의 범위를 점점 확대시키고 그 자유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나 만끽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런 문화의 흐름 속에서 따라오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무조건적인 자유라는 것을 성서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 오락적인 사랑
이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드는 열매를 가져오게 된다. 과거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고 평안히 살 수 있게 된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데 거기에 도취가 되고 거기에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적이 되는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리석게 보고 육체의 쾌락과 정욕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더러운 피의 작용에 따라서 음란, 사치, 방탕으로 그 소욕을 채워보려는 사람이 될 때는 인간의 참된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한다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생명이 없는 죽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바른 사상이나 바른 진리를 가진 것이 없이 그 시간에 오는 만족과 쾌락을 일삼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 오락적인 사랑으로 멸망을 가져오는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2. 타협적인 사랑
사람의 정신 작용의 발달에 따라서 서로 이해를 해 가면서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는 좋은 것 같으나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는 타협적인 사랑이므로 대적이 된다. 왜냐하면 타협적인 사랑의 노선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양심에서 죽어도 그 사랑밖에는 없다고 싸워 나가던 교회가 그 마음이 식어지고 다른 사상과 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랑하자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는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위하여 죽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죄의 사상을 가진 주의를 이해하고 교제한다면 자동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소위 통합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십자가 사랑 중심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타협적인 사랑으로 흐른다는 것은 사랑 같으나 죽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납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 죄를 용납하는 사랑으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죄를 용납한다면 죄를 위하여 죽은 사랑은 완전히 무효가 되고 만다. 어느 때에는 죄 때문에 죽고 어느 때에는 죄를 용납한다면 죄를 위하여 죽은 십자가의 사랑은 폐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실지는 심판 날에 죽는 사랑이다.

3. 편벽적인 사랑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사랑하시되 아무리 창기며 세리며 강도라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꼭 같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을 가지셨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를 편벽되게 사랑한다면 이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아니요,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사랑이 될 것이다. 어떤 목자가 자기를 대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대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진 자는 양 떼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이용물로 삼는 것이니 이용을 하는 자도 죽게 되고 이용을 당하는 자도 죽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남에게 주는 자라면 조금이라도 편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야 될 빚을 졌다고 생각 하면서 어떠한 괴로움이나 핍박이 와도 기뻐서 복음을 전했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해 준다면 그 사랑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든지 공급되므로 남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동시에 아름다운 사회와 국가로 발전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편벽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하여야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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