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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의 어제와 오늘
조성민 교수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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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6.20  14: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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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살롱-생활의 지혜)
 
『교동도의 어제와 오늘』
 
조 성 민 박사 (한양대학교 로스쿨 명예교수/대륙문인협회 이사장)
 
▲시간이 멈춰버린 교동도
 교동도(喬桐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본섬으로, 강화도 서북쪽에 있으며 면적은 46.9km²이다. 한강을 건너 황해도 연백군과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민간인출입통제선 위에 있다. 교동도는 2014년에 「교동대교」가 놓이면서 육지나 다름없는 섬이 되었다. 낙도분위기를 간직한 교동도는 급변하는 세태에 지쳐 느림과 추억, 향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차분한 안식처로 다가오는 섬이다.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합류하는 조강(祖江) 초입에 자리한 교동도는 고려와 조선에 걸쳐 전략적으로 중시되었다. 고려의 도성인 개성과 조선의 도성 한양으로 이어지는 뱃길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6.25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품은 곳이기도 하며, 평화와 통일을 상징하는 섬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21세기 어느 즈음에 시간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한 천혜의 자연과 사람 사는 마을이 한데 어우러진 보물 같은 섬으로 알려져 있다. 
 
▲교동 제비집을 찾아가다
 10:30에 교동대교에 도착했다. 교동도는 북한 황해도와 마주한 민통선 안에 있으므로 해병대 검문소에서 성명과 전화번호를 체크하고 교동대교를 건넜다. 교동대교(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사리를 잇는 다리로 길이는 3.44km)를 건너자 차창으로 해풍을 맞으며 자라 밥맛이 좋기로 소문난 교동도 쌀이 생산되는 드넓은 평야와 철새의 군무가 평화롭게 보인다. 
 대룡마을 입구에 있는 교동도 관광안내소 「교동 제비집」을 찾아가서 여행정보를 얻었다. 대룡마을에 사는 실향민들은 제비들이 집을 짓기 위해 물고 오는 흙을 연백 땅의 것이라 여기며 그리움을 달랬다. 제비집이란 이름에는 ‘고향인 황해도와 교동도를 자유롭게 오가는 수 많은 제비들’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시간이 멈춘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6.25 전쟁 때 실향민들이 일군 삶의 터전으로, 교동도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으나, 남북이 분단되고 철책으로 막히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실향민들이 생계를 위해 하나둘 장사를 시작하면서 생긴 곳이 대룡시장이다. 대룡시장은 60년대 어디쯤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좁다란 골목 안에는 이발소, 다방, 상회, 철물점, 극장, 사진관 등 수십 년 전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는 곳이다.
 대룡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수십 년 넘게 가위질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교동이발관’이 보인다. 간판은 여전히 이발관이지만, 이제는 2세가 분식집을 하고 있단다. 바로 옆으로 ‘철물점’ 간판이 보인다. 여러 품목을 파는 잡화가게도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교동도 문화를 이끌던 ‘교동극장’은 식당으로 바뀌었다. ‘달고나 가게’로 가서 국자에 설탕을 녹인 후에 소다를 넣어 부풀려 철판에 올린 다음 둥근 철판으로 누르고 별 모양을 만들어 떼어 내는 체험을 했다.
 
▲망향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대룡시장에서 망향대로 향했다. 「망향대」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난 나와 정착한 실향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분단 전에 교동도와 북한의 연백군은 생활권이 같아 뱃길로 왕래가 잦았지만, 분단 이후 연백군 등 황해도에서 온 피난민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주차장에서 산 위로 50m 올라가자 「망향대 비」가 있다. 망향대에서 바다 건너 북한 땅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불과 3km 앞에 두고 갈 수 없는 북한 땅, 고향이 손에 잡힐 듯 바라보이는 곳이다. 실향민들은 매년 여기에서 제사를 올리며 고향 산천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단다. 
 
▲교동읍성과 교동향교
 한가론 섬길을 헤치며 교동읍성으로 갔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았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이며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다. 동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류,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다. 이때 문루란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을 의미한다. 동문과 북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문루 부분이 무너진 것을 201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교동읍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동향교가 있다. 향교는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고려 충렬왕 12년에 유학자 안향이 중국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이곳에 모셨다. 향교 앞에는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 목민관의 비석이 있다. 비탈진 곳을 올라 향교 안으로 들어서자 대성전과 유생을 교육하던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모노레일을 타고 화개산 스카이워크에 서다
 교동도 화개공원의 2층 모노레일 탑승장으로 갔다. 이곳은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다양한 꽃들이 식재되어 있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주말 나들이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모노레일은 길이 1.2km이며, 9인승 캐빈이 5분마다 운행하고 화개산 정상까지 20분 걸린다. 모노레일의 평균속도는 시속 3.5km로 걷는 속도와 비슷하다. 고도차는 150m이며 화개정원을 거쳐 지대가 높아지면서 넓은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가 훤하고, 바다 건너에는 북녘땅이 보인다. 스카이워크는 화개산 정상 서쪽 300m에 있으며, 지면에서 40m 떠 있어 고도감이 아찔하다. 바닥이 투명유리로 된 원형 스카이워크는 절벽 위로 돌출돼 있어 고도감이 아찔하고 조망이 탁 트였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교훈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주로 낙인찍혀 1506년에 강화도 교동의 화개산 기슭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유배지를 찾아갔다. ‘안치’는 거주의 제한을 두는 조선시대 유배형 중의 하나로,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외부인 출입도 금지된다. ‘위리안치’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귀양 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것을 말한다. 
 연산군은 집권 초기 10년간은 태평시대를 열었으나, 그 후 소통의 부재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연산군은 교동도에 위리안치되고 두 달 만에 이곳에서 사망했다. 연산군이 선정을 베풀고 성군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떠올리며 자리를 떴다.
  (2023.12.2.토)    
 
 
 
    조 성 민
한양대학교 로스쿨 명예교수(법학박사)
대륙문인협회 이사장(시인/수필가)
황조근정훈장 수훈
전)한양대 법과대학/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양대 학생처장/대외협력처장
   국가경찰위원회 위원
   성산효대학원대학교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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