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이야기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역사는 한 점의 거짓 없는 사실만을 기록할 것이다.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여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했던 조선 최고의 천재. 부모의 묘보다 더 윗 단에 모셔진 그의 묘를 보고 역묘라고 후손들은 부른다. 자식이 현달하고 입신양명을 하면 부모 보다 더 위에 모시는 풍습이 있다는 조선의 예법이 재미있다. 충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중시했던 유교 사회에서 말이다. 신의와 우의, 여자의 열(烈)을 강조했던 당시의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듯, 당대의 최고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율곡의 묘보다 살짝 위에 쌍분으로 모셔진 노씨 부인의 묘. 시부모 보다, 남편 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열녀의 묘. 남편의 묘를 지키다가 왜인에게 겁탈 당하기 직전, 하녀와 함께 은장도로 자결했던 여인. 전쟁이 끝나고 가묘를 팠을 때는 시신이 썩어 부인과 하녀를 구분할 수 없어 두 여인을 함께 묻어주었다는 파주의 이야기. 주인마님을 따라 자결했던 어느 하녀도 율곡 보다 더 높은 곳에 모셔졌다. 

  문산역에서 버스로 이동하여, 자운서원에 들어서자 타임캡슐을 타고 몇 백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조선의 대학자였던 그의 학식과 덕을 기리기 위해 지방의 유림들이 1615년에 세웠다는 서원. 겨울 풍경이 단청 빛에 운치를 더한다. 자운산 밑에 곱게 단장한 강인당 - 유학을 강의했던 강의실, 문성사 - 율곡 이이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곳, 기숙사, 재실 등이 고즈넉하게 오늘이라고 하는 현재 속에 파묻혀 있는 시간의 구슬 같다. 우주의 모든 것이 기운에서 시작한다는 율곡의 기(氣)철학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겠는가? 
 다만, 율곡이 있는 곳에는 신사임당이 신발 한 켤레처럼 세트가 되어 이야기 되는 것이 흥미로울 뿐이다. 자운서원에도 강릉 오죽헌에서처럼, 율곡이 써놓은 시와 서체 옆에 신사임당의 그림( 과일, 난초, 물고기, 새, 풀벌레 등)과 글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두 분의 영정도 단짝처럼 나란하다. 7남매 중 율곡을 잘 키운 조선의 여인. 착하기만 하고 자식 교육이나 집안 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무능한 남편을 둔 사임당은 그런 여건 속에서도 인내한 여인으로 칭송받는 것이 아닐까?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다가 나이 50세(사임당 47세, 사임당이 죽기 1년 전)에서야 간신히 녹봉조차 받지 못하는 하위직급인 수운판관 -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나르는 배를 관리하는 일을 했던 사임당의 남편. 거기다가 주막집 여자를 첩으로 들였던 남편을 향한 쓰린 가슴을 안고도 가정을 잘 지켜냈기에 현모양처의 대명사가 됐을지도 모른다.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을 죽이며 희생한 여인이 사임당이었다. 아이들의 아버지로, 아내의 남편으로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버린 남편의 빈자리에서 그녀는 늘 외롭고 맘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48세의 나이로 사임당은 세상을 뜨게 된다. 율곡이 16세 때의 일이다. 
 당시의 유교주의 현실 속에서 한 여성으로서의 인권과 권리는 송두리째 빼앗긴 채, 인내만이 강요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녀의 부모에게는 “천재 예술가”로 소중했던 딸이었지만, 무능한 남자의 “아내”로 “일곱 아이의 어머니”로 정체성을 강요받으면서 그녀는 차츰 자신을 상실해 가지 않았을까?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유교 경전을 읽고 싶었을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율곡의 어머니. 
 
 그러나, 우리들은 거성(巨星)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고 벼슬다운 벼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여 자식들에게 당당하지 못했을 아버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는 강릉에 내려오지 말라고 10년씩이나 한양으로 등 떠밀렸던 남자. 아내와 늘 멀리 떨어져 주눅 들어 살았을 율곡의 아버지. 아내가 죽자 주막집 여자였던 첩을 부인으로 들여 자식들과의 갈등과 집안에 불화를 만들었던 율곡의 아버지. 율곡의 계모는 술을 좋아하여 아침에도 해장술을 마실 정도였고 조금만 비위가 상하면 빈 항아리에 머리를 박고 소리를 지르며 울고, 끈으로 머리를 묶으며 자살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 가정환경이 싫어 율곡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가출하여 금강산에서 1년 동안 수도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늘 유교경전을 가까이 하던 기품 있는 어머니와 비교되는 천한 신분의 여자를 계모로 섬기기가 쉬웠겠는가? 그러나, 사임당과 자식들에게까지도 열등감을 느껴서였을까? 만만하고 젊은 주막집 처자에게서나마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떠받들림 받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 그는 죽어서는 아무 말 없이 사임당과 합장된 채 함께 파주에 묻혀있다.
아무리 무능했다고 해도, 이원수가 있었기에 율곡이 있는 것이다. 율곡을 위해 마을 뒷산에 밤나무 1000그루를 심게 하여 호랑이에게 물려 갈 뻔 했던 아들을 구한 부성(父性) 깊은 아버지.  이원수는 어찌 보면, 아내 사임당과 율곡에게 치여 평가절하 되고 있는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조선시대에 벼슬하지 않고 주색을 즐기며 한량으로 지냈던 양반이 한 둘이었겠는가? 이조판서까지 높은 벼슬에 오르고, 선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율곡의 이름에 눌려 아들과 비교당하며, 사임당의 치마폭 그늘에 가려진 피해자일 수도 있다. 신분 계급이 철저했던 봉건 사회에서 양반 사대부의 가장(家長)이 처자식을 위해 막노동을 해서 가족을 부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사회 제도 속에 양반 남정네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거 외에 다른 길이 또 있었을까? 그가 요즘처럼 직업군이 다양한 세상에 태어났다면, 사업 수완이 뛰어난 사업가가 되었을 수도, 운동선수나 엔지니어나 건축가나 그의 적성에 맞는 어떤 일에서든 대성을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신사임당의 그림을 사랑하여 친구들에게 자랑했던 것으로 보아 예술 애호가였다.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술가로 성공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공자의 가르침과 유학에 능통하는 것만이 훌륭하고 유능하다고 인정받던 폐쇄적인 사회에 그는 패배자였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사임당과 아들에게 기(氣)가 눌려 자신의 무능을 비관하며 희생된 가장.  십만양병설로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려했던 선견지명의 대학자를 낳은 사람. 조선시대 한 아버지에 대해서 획일화된 잣대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파주의 겨울바람은 서울보다 더 차갑게 볼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