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을 걸으며   

姜 美京(시인, 여행작가)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연인들은 이별을 한다는 속설이 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서대문에 정동 극장 - 강북 삼성병원 내에 경교장까지를 정동길이라고 한다. 이 길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어찌 보면 길 전체가 근대 역사의 박물관인지도 모른다. 근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길을 연인들이 걸으면 헤어짐으로 이어져 아파야하는지도 모른다. 
 정동 길은 ‘걷고 싶은 거리’,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한 길, ‘낙엽을 쓸지 않는 길’ 이라는 다양한 애칭을 갖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는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황금빛 낙엽을 밟으며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서울 시립미술관 앞뜰에는 꽃과 조형물들의 천국이다. 거기다 100년이 넘은 붉은 벽돌 건물인 정동교회의 멋스러운 건축양식까지 더해져 이 길은 한마디로 멋있는 길. 아름다운 길임에 틀림이 없다. 
 덕수궁 대한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하여 정동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보고 싶은 낭만의 거리. 주말이면 이곳은 데이트 족들이나 젊은이들로 인해(人海)를 이룬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어대며 그들의 마음에 추억의 한 잎사귀를 쌓는 곳. 사람들이 꽃잎 한 장을 그들 가슴에 품고 가는 곳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생각 없는 발걸음들인가?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에 이곳에 서린 역사의 아픔을 한번쯤 생각해주는 이가 몇이나 될지 참 궁금하다. 

나는 이 길을 아픔의 길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참으로 아픈 곳. 서럽도록 슬픈 구한말 우리 역사의 흔적. 덕수궁에서 정동 길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덕수궁의 原名은 경운궁이었다. 조선 덕종의 부인이었던 소혜왕후(인수대비)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예종이 죽자, 자신의 첫째 아들인 월산대군 대신 총명한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고, 월산대군을 정궁이었던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이곳 경운궁에 살게 했다. 동생보다 열등한 형,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던 곳. 아마도 월산대군은 평생을 이곳에서 왕의 못난 형으로 아픈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구한말, 명성황후가 일본 놈들에게 시해되자 고종은 자신도 일본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두려워하며 잠시, 월산대군의 사저에 와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였을까? 끝내, 고종은 덕수궁 뒤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에 월세를 내고 세자와 함께 그곳에 몸을 피했다. 한 나라의 황제가 남의 나라 공사관에 세를 들어 살다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였던가? 

 우리 일행이 러시아 공사관을 찾았을 때는 휑하니 망루만 하나 남아있었다. 한국 전쟁 때 불에 타버리고 덩그마니 외롭게 우뚝 서있는 공사관 작은 건물 하나. 역사의 찌꺼기가 4월의 거센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아관 파천하여 고종은 외로이 혼자 덕수궁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공사관 사진을 찍는 내내 고종이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상상에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사람이 고종이었다는 기록을 어떤 역사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쓰디쓴 커피에 설탕을 잔뜩 넣어 마셨던 고종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다. 기울어져 가는 한 나라의 황제가 잃을 대로 다 잃고 자신의 목숨 줄 하나 붙잡고 있던 아픈 심정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결국, 고종의 아들 순종 때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잃고야 말았다. 고종이 염려하던 일이 덕수궁 뒤편에 지어졌던 현대식 건물, 중명전(重明展)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 황실 도서관으로 쓰였던 곳에서 말이다.

 요즘은 이곳을 예쁘고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멋스러운 풍취가 물씬 풍기는 길. 그 길을 걸으면서 구한말에 우리 역사의 쪽지를 생각하는 이 몇 명이나 될른지?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정동길을 걷다가, 김구선생이 시해당한 경교장을 둘러보는 젊은이들이 몇이나 될른지? 꺼져가는 촛불을 살려내려 몸부림쳤던 고종황제, 김구선생의 한이 서려있는 길. 그 길 위에 노란 은행잎이 가득 덮였다. 겨울이 오면 하얗게 눈으로 덮일 것이다.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들이 고종 황제나 구국의 아픔이나, 김구선생의 혈열(血熱)을 한 순간만이라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덕수궁 돌담길, 아름다운 정동길에서......
 
 중명전重明展에서 
                                                강미경

돌담 위 분홍 벚꽃은 봄을 말하고 있지만 
정동 길 녹슨 바람 소리는 꽃잎의 입을 막았다
아파도 아름답다고 아뢰라고

유리 상자에 다리를 절며 울고 있는 아들의 옥쇄 
하얀 종이에 거북이 피 발자국 하나
공처럼 거기서 튕겨 나와 하얀 사각기둥을 따라갔더니
*러시아 공사관의 파편, 망루 하나 
어스름 속에 덩그마니 서 있다

옥탑 아치형 창문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는 사내 
덕수궁으로만 향한 시선이 쓸쓸하다
짝 잃은 외로운 꾀꼬리를 읊을지언정 
만주벌판을 달리고 싶었던 유랑인流浪人 
황금빛 옷자락 그림자가 정동 길에 누워 하이애나 소리로 타올랐다 

아파도 아름답다고 아뢰라는 
하늘에 띄우는 승전가勝戰歌 화들짝 피어오르는 소리 

미술관 뜰에 앉은뱅이 꽃들도 춤을 추며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