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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역사(驛舍)에서 열차를 타며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블라디보스토크 해변에 위치한 숙소는 정결했다. 브라디보스크에 도착한 여행 둘째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시내 중심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찾아 갔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역풍경은 아침 공기 속에서 차분해 보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동쪽 끝, 종착역이라는 말답게 고즈넉한 풍취를 더하고 있다. 이 역에는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보이질 않는다. 계단만 즐비해 보인다. 이 역에서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고 달리면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으로 갈 수 있다.
보름도 넘게 걸린다지만, 달리고 싶다. 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자작나무 숲이 우거진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하염없이 가고 싶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고 여행은 자유 하는 것이고 여행은 탐색하는 것이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열고 나가 갇힌 동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토굴을 뛰쳐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뻗어나가고 그렇게 달리고 싶은 질주의 욕망. 고대인들은 그곳에 갈기를 휘날리며 말을 달렸을 것이다. 말 대신 열차를 타고 달리는 것도 좋으리라. 그런데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얽힌 세 가지 일들이 가슴을 파고들어 인두 자국을 빨갛게 내고 간다.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 역에 대한 이야기에 얽힌 우리 민족의 애환을 듣지 않았으면, 동화 같은 낭만에 젖어 달리고 싶은 욕망을 불태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게 시인의 시선이라고 했던가? 무당 같은 신기가 아니라도, 이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 그의 붉은 발자국은 역 어디에도 찾아볼 길이 없다. 1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으니, 흔적의 먼지 한 톨. 모래 바퀴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다.
그러나 먹먹해 오는 화인 같은 인두 자국이 찌지직 마음을 누른다.
안중근. 안응칠. 독립운동가. 하얼빈 역에서 일본 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숨지게 했던 독립 영웅. 가난하고 의협심 넘치는 그에겐 권총 한 자루 변변한 게 없었다. 독립 운동에 대한 굶주린 의협심만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 물질적인 후원과 차표와 권총을 마련해 주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알맞은 장소-하얼빈 역을 물색해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의 뒤를 보아준 이-최재형 선생이었다. 연해주 대륙의 영웅으로 독립운동의 거장이지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사회주의 운동계열에 속해있었기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였다. 1년 전에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 준비를 하다가 최 재형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대륙의 영웅 최재형’-이수광의 역사 소설을 구해서 읽게 되었다. 562쪽이나 되는 긴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처럼 스릴 넘치는 이야기를 묵도했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오늘의 안중근 의사를 있게 한 것은 어쩌면 최 재형 선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알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최 재형 선생에 관한 글은 다음에 하나의 독립된 글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발길을 옮겨 기차를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하자 기차 시간까지는 7분의 여유가 있다고 했다. 역 1층 로비에는 대형 마트로시카 인형-러시아의 ‘어머니 인형’이 사람 키보다 더 큰 크기로 서 있다. 그곳에서 삼삼오오 기념사진을 찍으며, 1, 2분 남는 시간에 급히 인형을 한 개씩 사들고 우리는 기차에 올랐다. 세 명씩 앉을 수 있는 기차는 우리나라 무궁화 열차보다 더 열약한 느낌이었다. 기차에 발을 올려 놓으려하자 안중근 의사의 커다란 구두 발자국이 보이는 것 같다. 꼭 108년 전에 이곳에서 열차에 몸을 실었을 한 남자-안응칠이 생각난다. 그의 품에는 최 재형 선생이 구해준 권총이 하나 숨겨져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 품에는 급하게 산 러시아 목각 인형 하나씩이 들어 있었다. 인형 하나를 열면, 또 하나의 인형이 나오고, 또 열면 또 하나가 나오고……. 광활한 면적을 가진 등치 큰 러시아 사람들이 그리 정교한 인형을 작게 또 작게 만들 수 있었는지?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뜻이라고 한다. 많이 낳아 번성하라. 셀 수 없는 별 만큼 사람이 많아지면 좋은 일일는지? 그날 우골라야 역으로 가는 횡단열차는, 자작나무 숲이 광활한 시베리아를 달리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엉덩이가 풍만한 러시아 여성들이 열차에 많이 타고 있었다. 앉을 자리가 없는지 서 있는 사람들도 많았고, 열차의 낭만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50 여분이 흘렀다. 운이 좋게 창가에 앉은 시인은 저게 아무르강이라고 환호를 보내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는 아무르 강. 자작나무 숲의 광대함은 보이지 않고 우리는 서둘러 열차에서 내려야 했다. 시베리아를 서쪽으로 횡단하면 유럽이 나온다는데,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우골라야 역에서 내렸고, 그곳을 우수리스크라고 했다. 2017년 9월 12일에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맑은 날씨여서 그랬는지, 햇살이 작렬하게 대지에 내리꽂히고 있다. 햇살이 따가 와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초가을의 날 것의 햇살.
우리 일행은 우수리스크에 있는 29번 학교-김나지움 학교를 방문했다. 학생들이 계단에 양옆으로 서서 러시아 국기와 태극기를 들고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러시아 전통 빵을 한국어 교사가 은쟁반에 받쳐 들고 우리를 환대한다. 빵을 뜯어 소금에 찍어 먹으라고 했다. 오후 2시쯤 되었던 것 같다. 나른한 오후 수업이 한창일 때 우리는 수업 참관을 하며 마음이 뭉클해 온다. 한국을 동경하며 한국어를 배우는 한국어 수업이 있다고 하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그곳에서 보여준 공연-초등학생들의 전통 무용과 노래 등을 관람한 후 우리는 고려인문화센터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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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까레이스키. 먹을 것을 찾아 고향땅을 버리고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했던 조선 사람들. 그들이 따뜻하고 포근한 모국을 떠나 남의 나라를 찾아간 것은 단순히 먹을 것을 구하는 푸른 팔뚝의 구릿빛 슬픈 숟가락질만은 아닐 것이다. 고향 땅에서 힘겹게 곡괭이질을 하며 농사를 짓는 만큼만 고생하면, 노비도 상것이라는 천시도 없는 땅-평등의 땅을 염원한 그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을 혹한의 땅, 러시아-동토의 설원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진 나라, 설움과 가난과 억압의 삶을 살아야하는 그들에게는 누구나 평등한 나라에서 일한만큼 하얀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과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여인의 풀어헤쳐진 젖가슴과 고향의 이팝나무처럼 하얀 쌀밥이 고봉으로 담긴 나라. 배우지 못한 그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차별받지 않고 포만의 기쁨을 얻고 싶은 게 그들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에 보았던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그들은 짐칸-개, 돼지, 닭을 태우는 동물 칸에 태워져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스탈린의 고려인들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나라라고 하는 지붕이 없는 고려인들에게 때려대는 폭비를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으리라. 가슴이 먹먹해 온다. 그들 까레이스키들이 러시아 국적을 갖고 러시아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면서, 그리워도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고국을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을지? 나라를 잃은 이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압록강 넘어 남의 땅,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본과 혈전을 벌였던 이야기도 짧은 이 글에서는 모두 담을 수 없을 것 같다.
전송
말만 들어도 흥분을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엘리베이터도 없는 동방의 끝, 블라디보스토크로 시계바늘의 분침分針을 돌려
백 년 전 엊저녁 너에게 카톡 카톡을 전송한다
품에 부라우닝 M79299 권총 숨기고 하얼빈 열차에 발을 올려놓았을 108년 전의 그의 구두 한 켤레.
입을 벌렸던 열차 문이 시간의 동공을 닫고, 그의 부은 발등을 긴 머리 여류 시인 빨간 구두 자국을 밟자, 세기 전으로 돌진해도 총 대신 이미지를 장전한 시어의 권총 방아쇠, 방아쇠 당기지 못했던 다리 저린 시인의 눈시울
굶주린 열차에 태워진 누덕누덕 기운 신발들이 쫒겨가던 횡단열차.
개, 돼지, 닭을 실었던 화물칸에 압축파일로 전송되었던 까레이스키들.
아무르강 자작나무 숲에 가려진 파일명 : 화려한 배고픔 길다
2017. 9.26.
또한 헤이그로 가기 위해 러시아 횡단 열차에 발을 올려놓았을 1907년도 이상설 선생과 이준 열사의 발자국도. 종이 장에 조차 아무 표시도 되어 있지 않지만, 블라디보스토크 역 1층 로비나 역 입구쯤에 한글과 러시아어로 표지판 하나 세워두면 좋겠다.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받아, 그렇게 그들의 발자취를 그려주면 좋겠다. 네덜란드 헤이그로 먼 여정을 떠났던 이상설 선생과 이 준 열사의 발걸음을 그곳을 찾는 우리들도 러시아인들도 기억할 수 있게.
그리고, 신께서 나에게 여행을 허락하신다면, 이상설 선생과 이준 열사가 함께 달렸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자작나무 숲을 달리고 또 달리고 싶다. 나는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한다. 열차에서 무념의 나를 발견하고, 무념의 나를 찾는 여행 모티브를 얻고 싶다.
국문과 나의 은사님 이어령 교수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여행 모티브는 재생 모티브-원형(Archetype)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이전의 무지의 자아가 죽고, 여행지에서 새로운 체험을 얻어 다시 살아난다는 재생 모티브가 곧 여행인 것이다. 여행지에서 얻은 값진 체험들이 있어서, 진주처럼 영롱하게 엮을 수 있어서 고되어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강 소이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싶은
흑마들의 갈기
시린 벌판을 어기적거리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창 밖에 아무르강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른다
촉촉하게 젖은 여인의 봉긋한 가슴팍을 풀어헤치고
젖줄 흐르는 가나안 땅 찾아
헤치고 굶주렸을 황토빛 시베리아엔
배고팠던 강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까레이스키들의 노을빛 눈물
노을도 비껴간 횡단열차는 목이 마르다
간밤에 끊긴 연인의 전화선처럼
아무르 강에 말없이 흐르는
바람의 뒤 꼭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