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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오덕홍, 김일언, 정래의 선생
박순태 기자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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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6.19  17: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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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오덕홍, 김일언, 정래의 선생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구국의 일념으로 외세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하신 독립유공자 오덕홍· 김일언·정래의 선생을 202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오덕홍(吳德弘) 선생은 1885년 4월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8월 12일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 20여 명을 이끌고 나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1909년은 1907년 8월 전국으로 확산된 의병전쟁이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대응하여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선생은 의병들을 모집하여 30여 명 규모의 유격부대를 창설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소규모 유격부대가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작전을 위해 보병 2개 연대 2,260명과 해군 및 현지의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였다. 그리하여 호남 동북에서 서남으로 포위망을 압축하였고, 해안선에는 육지에서 밀려오는 의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뢰정대를 출동시켜 해안을 봉쇄하였다.

선생은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대항하여 의병부대를 이끌고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거나 배신자 등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덕홍 의병부대 등의 유격전은 성과를 보여 10월 1일로 종료하려고 했던 남한대토벌작전이 10월 25일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오덕홍 의병장은 1909년 9월 23일 나주군 아계면(芽界面) 일동(日洞)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김일언 의병장과 정래의 의병장이 참여하여 활약한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측근으로 시종관이었던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규모의 의병봉기를 계획한 것에서 출발한다. 1906년 9월 석방된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 봄이 되면서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제2차 산남의병 총대장에 정용기 의병장을 추대하고 김일언 의병장은 우포장(右砲將)에 임명되어, 정래의 의병장은 우익장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산남의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본격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07년 7월경이었다. 산남의진은 본진 약 300명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죽장에서 천령(泉嶺, 함양군)를 넘고, 1대는 신광에서 여령(麗嶺)을 넘어 7월 17일 청하읍(포항시 청하면)을 공격하였다. 청하읍내의 분파소 등을 파괴한 뒤 한인 순사 1명을 처단하였다. 대구진위대 참교 출신 우재룡(禹在龍)이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함께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산남의진이 영천 화북면 자천(慈川)을 거쳐 청송지역으로 이동하자 들어가자 일본군이 영천에서부터 추격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부대를 2대로 나누어 영천 화북에서 청송 현서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청송 안덕으로 이동했다.

1907년 8월 14일 청송 안덕면 신성(薪城)에 도착한 후 신돌석 의병부대로부터 일본군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일본군의 공격 전에 매복했다.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개 소대 병력 약 30명이 신성지역으로 들어오자 밤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8월 15일 새벽 현동 추강(秋江) 뒷산으로 패주하였다. 

청하군 죽장면 절골 개흥사(開興寺)에 머물고 있을 때인 8월 18일 강릉의병부대가 내려와 합류하였다. 이날 김일언 의병장은 죽장면 침곡(針谷)에서 일본군 척후 1명을 사살하였고, 8월 24일에는 일본군 영천수비대를 유인하여 일본군 1명과 영천관포들을 체포하였다. 관포는 타일러 보내고, 일본군 1명은 처단하였다. 일본군은 자양전투의 보복으로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지만 산남의진은 오히려 8월 25일 청하읍을 공격하여 일본군 1명이 사살되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 등이 소각되는 피해를 입혔다. 

산남의진은 음력 9월 초순까지 강릉에 도착할 계획을 세우고 북상 준비를 하면서 8월 29일 본진 병력을 청하군(淸河郡) 죽남면(竹南面)의 매현(梅峴, 현 포항시 북구 죽장면 매현리)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8월 29일, 9월 1일(양력 10월 7일) 척후병으로부터 두차례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김일언 의병장은 조암(瞗巖)으로 이동하여 매복하여 기습하려 했지만 일본군은 어둠을 이용하여 공격을 피해 있다가 기습 공격하였고 의병은 참패했다. 이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였고, 정환직이 총대장으로 추대받았다. 

산남의진은 영일 복동대산(北東大山)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근거지를 마련하고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정래의 의병장은 좌익장, 김일언 의병장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청송의 보현산과 영일의 북동대산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9일에 청하분파소를 공격하여 순검 1명을 처단하고 분파소를 소각하였다. 또 10월 21일(양력 11월 26일) 흥해를 공격하여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처단하였다. 11월 4일에는 신녕(新寧, 영천시 신녕면)을 공격하여 분파소에 보관되어 있던 총기 등 60여 점을 확보하였다. 이튿날인 5일에는 의흥(義興)을 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총 49자루를 확보하는 전과를 올렸다. 11월 10일에는 추격하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보현산으로 모인 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청송으로, 다른 하나는 영일군 기계(杞溪)로 이동하였다. 11월 16일에는 흥해를 공격하게 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을 처단하였다.

일본군과 지속적이 전투과정에서 주요 의병장이 전사하거나 물자 보급이 힘든 상황에서 산남의진의 전력이 점점 약화되고, 일본군의 포위망도 계속 좁혀져 왔다. 이 때 13도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자 북상하여 관동으로 집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정환직 의병장이 1907년 11월 7일(양력 12월 11일) 죽장면 각전 고천(高川)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에 잡혀 대구로 압송되던 중 11월 16일(양력 12월 20일)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관동집결도 무산되었다.

정환직 의병장이 순국한 이후 최세윤이 새롭게 산남의진 총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산남의진도 재정비되었다. 재정비된 산남의진에서 정래의 의병장은 참모장에, 김일언 의병장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정래의 의병장과 김일언 의병장은 최세윤 의병장과 경상도 일대에서 장기전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남동대산을 근거지로 하고 부대를 소규모 유격대로 나눠 보현산, 팔공산, 주왕산, 철령, 주사산 등지에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최세윤 또한 1908년 8월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이세기와 서종락 김사곡 등이 전사, 체포되면서 산남의진은 와해되고 말았다. 김일언 의병장의 의병활동도 산남의진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한편, 정래의 의병장도 역시 산남의진이 해산됨과 동시에 의병활동을 멈추었지만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를 조직하여 의병으로 다시금 활동하고자 하였다. 정래의 의병장은 조성목, 정순기, 정호용 등과 산남의지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국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순국의병추모사업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를 조직하였다. 

참동계는 흥해, 영천 등 영남일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이 때 정래의 의병장은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자백 강요, 심한 고문 등을 당하였지만 체포 직전에 주요 서류 등을 소각했기에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결국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오덕홍 의병장은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일언 의병장은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정래의 의병장은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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