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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폭탄의거, 강윤국·유만수 선생2023년 7월 독립운동가
박순태 기자  |  kore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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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8.07  15: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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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과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1945년 부민관에 폭탄을 터뜨린 독립유공자 강윤국(1990년 애국장), 유만수(1990년 애국장) 선생을 ‘202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강윤국·유만수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부민관폭탄의거를 결연히 실행한 독립운동가이다. 부민관폭탄의거는 1945년 7월 24일 강윤국, 유만수, 조문기 선생 등 대한애국청년당 소속인 세 분이 일본 침략전쟁 동원행사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 행사장인 부민관(현재의 서울시의회)에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다.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박춘금 등 친일 세력이 한국인을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개최한 어용집회(御用集會)이다.


강윤국·유만수 선생은 1945년 7월 24일 행사 장소인 부민관을 폭파하여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무산시킴으로써, 항일투쟁과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몸소 실천하였다. ‘부민관폭파의거’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기간 중 전개된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광복 직전까지 이어졌던 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의거였다.

강윤국 선생은 1926년 서울 중림동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가 견습공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강윤국 선생은 경기 안성 출신의 유만수 선생은 가와사키(川崎) 일본강관주식회사 공장에서 노동자로 만나 일본인들이 한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을 목격하고, 민족차별에 반대하는 농성 시위를 주도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강윤국 선생은 독립이 머지않았음을 깨닫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며 1942년경 귀국했다.

국내로 돌아온 선생들은 우연히 다시 만나 의기투합해 1945년 5월 일본강관주식회사 동료들과 친일 거두(巨頭)와 침략 원흉(元兇) 처단을 위해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였다. 


강윤국 선생은 부민관폭파의거 계획단계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국수공장에 자주 오던 헌병 장교에게서 권총을 탈취하여, 의거 당일 일본 헌병과 경찰을 저격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들이 설치한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지면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박춘금과 일제는 현상금을 내걸어 수색에 나서지만, 강윤국 선생은 경기도 화성의 야학당에 피신하여 항일거사를 또다시 계획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만수 선생은 1921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겪은 민족차별 경험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던 중 훈련공 모집 공고를 보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 공장에 배치된 유만수 선생은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들을 만났다. 1943년 5월 회사 측이 민족차별적 내용을 담은 책자를 유포하자 선생은 한인 노무자들을 결속하여 파업을 주도했다.


강윤국 선생은 부민관폭파의거 계획단계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국수공장에 자주 오던 헌병 장교에게서 권총을 탈취하여, 의거 당일 일본 헌병과 경찰을 저격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들이 설치한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지면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박춘금과 일제는 현상금을 내걸어 수색에 나서지만, 강윤국 선생은 경기도 화성의 야학당에 피신하여 항일거사를 또다시 계획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만수 선생은 1921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겪은 민족차별 경험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던 중 훈련공 모집 공고를 보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 공장에 배치된 유만수 선생은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들을 만났다. 1943년 5월 회사 측이 민족차별적 내용을 담은 책자를 유포하자 선생은 한인 노무자들을 결속하여 파업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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