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눈

최 재 철 (한국외대 교수)

1. ‘겨울’ 하면 눈(雪)

‘겨울’ 하면 우선 ‘눈’이다. ‘눈’ 하면, 첫눈 눈길 눈발자국 눈사람 눈꽃 눈보라 고향 눈지붕 고드름 설국 설산 눈싸움 눈축제(유키마츠리) 등이 연상된다. 눈의 이미지는 담백 고결..

겨울의 꽃인 눈의 결정이 6각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일본인 나카타니 우키치로 박사인데, 그의 『눈은 하늘에서 보낸 편지』 라는 에세이집은 자연과학자의 시적 산문으로 알려져 있다. 눈의 영롱한 결정체 모양은 모두 다 다르다고 한다. 그 다양한 아름다운 모양을 ‘종이접기(오리가미)’로 표현하는 일본인은 역시 섬세한 민족이다.

2. ‘눈’을 노래하다 –중국과 일본-

‘눈 달 꽃(雪月花)의 때에 그대를 생각한다’ 라는 백낙천(白樂天)의 말처럼 겨울에는 눈 내릴 때 그대 생각을 하게 된다. 당나라의 자연시인 왕유(王維;701-761)는 「눈 내린 겨울밤 호거사(胡居士)의 집을 그리며」 라는 시에서 우정을 생각하며, 빈한하면서도 고결한 후한(後漢)의 선비 원안(袁安)을 호거사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 심야 들창 밖 바람이 대나무를 놀래키고

새벽에 문을 여니 눈이 온산에 가득하네 (開門雪滿山)

눈발 흩날리는 하늘에 깊은 골목 고요하고

쌓인 눈에 넓은 뜰 한가롭네

궁금하다 가난한 원안의 집에는

태연히 이제껏 사립문을 닫아놓았는가

원안은 가난했지만 이웃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아침 늦도록 침상에서 배고픔을 참았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 배경을 찍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 내릴 전조인 심야의 바람과 대나무 소리를 먼저 제시하고, 새벽 설경을 먼데 산에서부터 마을 골목길로, 그리고 아직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고 눈 소복이 쌓여 휑하니 넓은 집안 뜰로 차츰 가까이 다가와 보여주고, 마침내 굶주림을 참으며 아침 내내 방안에 홀로 웅크리고 있을 주인공 선비에게 초점을 맞추어, 궁금증을 극대화시키며 걱정하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본에도 이와 이미지가 유사한 요사 부손(与謝蕪村;1716-1783)의　하이쿠(俳句)가 있다.

묻어둔 숯불이여 나 은둔하는 집도 눈 속이네

　 (うづみ火や　我かくれ家も　雪の中)

이 단시는 위 왕유의 시의 방향과는 반대로 가깝고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크고 먼 데로 공간 배경을 확장해가고 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날 한밤중에 시인은 화로 안 재 속에 묻어둔 숯불에 의지하여, 아마 화로를 껴안듯, 이불을 뒤집어쓰고, 산촌의 작은 초가집에 은둔하고 있는데, 눈이 지붕에, 그리고 산과 들에 쌓여, 온통 천지가 눈이다. 재 속에서 가물가물하는 화롯불이 천지에 내리는 눈으로 이미지가 확대되며 우주를 품고 있는 셈이다. 또한 대자연 속에 융합된 인간의 화롯불 같은 소박한 삶의 한 순간을 읊고 있는 것이다.

일본 중세의 대표적인 노래를 모아놓은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1205년)에도 춘하추동 사계절 별로 노래가 실려 있는데, 겨울의 노래 156수 중에 눈을 소재로 한 것이 33수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겨울비, 달, 서리 순이다.

이제야 듣네 마음이란 흔적도 없는 거라는 것을

눈을 헤치며 님 생각 하고 있는데 - 665번

말 세우고 소맷자락 털 나무 그림자도 없네

사노(佐野) 나루터 눈 내리는 저녁 어스름 – 671번

겨울 풀은 마르고 헤어진 사람이 새삼스레

눈 헤치고 나타날 리 있으랴 - 681번

『신고금와카집』의 특징 중 ‘본가 인용(本歌取り)’ 등의 기법이 동원된 바로 위의 두 와카는 고대의 『만엽집』과 『고금와카집』 에 각각 수록된 노래의 한 구절을 차용하면서 새롭게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671번 노래는 본가(『만엽집』)의 ‘사노 나루터’(지명;‘歌枕’)를 인용하면서 ‘비’를 ‘눈’으로 ‘집’을 ‘나무’로 대체하였고, 681번 노래의 밑줄 친 ‘마르고/헤어진(かれにし)’은 앞 단어 ‘겨울 풀’과 뒤의 ‘사람’ 양쪽에 걸치는 동음이의(同音異義)의 ‘계어(掛詞)’로 이 앞 구절(겨울 풀은 마르고 헤어진 사람)이 『고금와카집』의 ‘본가 인용’이며, ‘겨울 풀’은 ‘마르다’의 ‘베개 말(枕詞)’이다. 이렇게 『신고금와카집』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수사법을 사용하여 정형 단시의 표현이 심화 확대되었고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근대시 중에 『사계(四季)』 동인인 미요시 타츠지(三好達治)의 「눈」(『측량선(測量船)』1930)은 간명하게 따뜻한 서정을 자장가처럼 노래한다.

타로(太郎)를 잠재우며, 타로네 지붕에 눈 내리네

지로(次郎)를 잠재우며, 지로네 지붕에 눈 내리네

3. 우리나라의 시와 수필 속의 “눈”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1651) ‘겨울 노래(冬詞4)’는 간밤에 내린 눈으로 달라진 바다와 설산의 경치를 보고 속세가 아닌 별세계를 마주하고 있는듯하다는 감탄을 읊는다.

간밤의 눈갠 후(後)에 경물(景物)이 달�銓藉�

이어라 이어라

압희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희는 천�L옥산(千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션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김진섭은 수필 「백설부(白雪賦)」(『조광(朝光)』1939, 『인생예찬』1947 수록)에서 순결무구한 눈에 대해,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라며, ‘우리의 마음을 열도록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백설의 계시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자연 계절의 신비를 예찬한다.

윤동주도 간밤에 내린 「눈」을 노래하며 동시같이 추위를 덮어주는 이불로 푼다.

지난 밤에 /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첫눈 내릴 때 사랑을 고백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눈은 풍년의 징조. 눈은 오곡의 요정)’ 라고도 한다. 올 겨울엔 가뭄 해갈과 물 부족 해결을 위해서 눈이 많이 내려도 좋으련.. ‘눈 녹 듯하다’는 말처럼 너와 나의 다툼이, 남과 북의 반목이, 한일 간의 이견이, IS의 증오가 눈 녹듯 녹아 평화로운 지구촌이 되길 기도한다. 마음 훈훈한 겨울이야기를 기대하며... [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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